새것, 오래된 것, 빌린 것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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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것, 오래된 것, 빌린 것

2015.01.27


지난 주말 아주 흥겨운 ‘혼인 잔치’에 다녀왔습니다. 
‘결혼식’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혼인 잔치’라고 말하는 이유는 즐겁고도 ‘쇼킹한’ 격식 파괴로 성경 속의 가나안 혼인 잔치를 연상케 하는 흥겨운 어우러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례 없는 결혼식, 남녀평등의 상징으로 신랑 신부 동시 입장, 폐백 생략, 혹은  나중에 하기, 저녁 시간대의 예식 등, ‘찍어내는’ 결혼식 모습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벤트 대행업체를 통해 신랑 신부를 주인공으로 한바탕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파격’이 지나쳐 ‘과격’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고 할까요?

하기사 우리 전통 혼례의 자리를 대신한 서양식 결혼 문화 자체가 이미 형식과 격식 파괴의 결과이니 거기에 다소 변형을 가한다고 대수로울 것도 없겠지요. 

눈에 익어 자연스럽달 뿐이지 신부 아버지가 신랑에게 딸을 ‘인계’하는 것과, 프랑스처럼 신랑이 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입장하는 것도 우리 처지에서는 둘 다 ‘빌려 입은 옷’에 불과합니다. 다만 오래 전에 빌려 입어서 익숙한 옷과 어색한 옷의 차이일 뿐. 

같은 이유로 질투하는 악귀로부터 신부를 보호하는 것에서 유래한 미국의 ‘들러리’ 풍습이 우리 결혼식에 아직 차용되지 않은 것, 호주처럼 혼인 신고에 해당하는 절차를 식 진행 과정의 일부로 끼워 넣지 않은 것도 어차피 우리 처지에서는 남의 문화일 뿐, 가져다 쓰면 쓰고 말면 말 일이지요.

좀 더 부연하자면 결혼식의 신성함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하객들은 신랑 신부에게 말을 걸 수 없도록 한 풍습이나, 축의금 대신 신랑신부가 받고 싶거나 필요한 살림 목록을 건네받아 자신의 형편에 맞게 선물하는 것 등도 우리에겐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랑 신부를 식장에서가 아니면 언제 또 만나 덕담을 건넬 것이며, 기왕 하는 것,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제일이니까요.^^

폐백으로 간소화, 모형화된 형태 말고 혼인식의 ‘몸통’으로 우리 전통 혼례가 복원되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있지만 너무나 요원한 일이겠지요.

이야기가 너무 곁가지로 갔습니다. 다시 지난 주말의 혼례로 돌아가 ‘쇼킹 파격’의 하일라이트를  말씀 드리자면 일단 주례 없는 결혼식까지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이어 신부 아버지가 성혼을 선포하고, 신랑 아버지의 엄숙함과 유머가 적절히 조화된 ‘감각 있고 느낌 있는’ 축사로 박장대소를 이끌어 내는가 싶더니, 이어진 신랑 아버지의 축가는 단박에 그날의 주인공 자리를 '꿰차며'  ‘대박전율’을 일게 했던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신랑 아버지가 축가를 부르는 것이 요즘 새로운 유행이라는 말을 듣긴 들었습니다.) 

한의사라는 직업이 무색하리만치 평소 가수를 여럿 '울리던' 노래 실력으로 나훈아의 <사랑>을 개사하여 아들 며느리의 이름을 넣어 진솔하고 절절하게 내외의 사랑과 해로를 당부하는 모습이라니!  아, 그 파격적 감동의 여운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신랑 측 혼주가 잔치 분위기를 주도하며 흥을 돋우어 놓으니 하루 온종일, 아니면 보통 저녁 9시에 시작해 밤새 이어지는 외국처럼, 저녁 6시 30분에 시작된 예식이 늦은 밤까지 잔치로 흥겹게 이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겠지요.   

혼인 예식이야 어떻든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을 겁니다. 두 사람이 오손도손 잘 살아 주었으면 하는 것, 금슬 좋은 부부로 오래오래 함께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 말입니다. 부모 자신들의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았다면, 이혼이나 사별 등으로 중턱에 파경을 맞았다면, 그러면 그럴수록 자식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선가는 신부가 결혼식 치장을 할 때 ‘새것, 오래된 것, 빌린 것’을 혼용하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웨딩드레스가 새것이면 베일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쓰고 웨딩 슈즈는 친구에게 빌려 신는 식이랍니다. 

자기 스스로의 판단과, 먼저 살아 본 사람의 조언과, 타인의 기대 등을 적절히 조화하여 지혜로운 결혼 생활을 이끌 것을 상징적으로 호소하는 신부를 향한 ‘결혼의 민낯’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혼에는 고통이 있지만, 독신에는 행복이 없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생각납니다. 지혜로울 수만 있다면 결혼 생활에서 ‘고통 있는 행복’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No pain, no gain’을 명심할 일입니다. 혹은 ‘pain’만 있고 ‘gain’은 없는 결혼 생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연애의 무덤이 결혼’이 아니라 ‘고통이 결혼의 무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은 인륜대사’라고 하지만 이집트에선 ‘결혼은 절반의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부부 화합의 길이 오죽 험난하고 지난하면 신앙생활에 비유를 했을까요? 

그럴수록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절절한 사랑이 담긴 개사된 나훈아의 <사랑>을 잊지 말길 바라며, 신랑, 신부, 행복하게 사십시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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