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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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2015.01.26

-조선 초상화에 숨은 선비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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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라대왕전에는 오래전부터 극락행과 지옥행 심사 때 한국인만을 위한 심사대를 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도 교묘하게 성형수술을 한 사람이 많아 얼굴만 보고는 죄상을 가려내기 힘들어 경력 대조, 원적 확인 등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불지옥엘 보내도 워낙 불가마에서 단련된 몸이라 “어 시원하다!”며 싱글벙글 웃는 통에, 그보다 더 고통이 심한 벌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 사오정이 어느 날 어머니에게 졸라댔습니다.
“엄마 나 치아 교정 좀 시켜 줘요.”
“돈 없다.”
“내 이가 삐뚤빼뚤한 거 다 엄마 탓이잖아요.”
“내가 너 낳았을 땐 그런 이는 없었다.”

인터넷에 한동안 떠돌아다닌 우스갯소리입니다.

부정모혈(父精母血)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은 살갗이나 터럭 한 올까지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孝經 효경 1편-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 그러나 현실은 보톡스 주사, 가슴 성형, 임플란트 시술, 머리카락 염색, 눈썹 문신, 사각턱 수술, 심술주머니 제거, 콧날 세우기 등 과학의 힘으로 타고난 제 몸을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효(孝)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으니 불효라고 나무랄 세태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 우리나라 초상화에 나타나 있는 시대정신을 접한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지난해 명지대에서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변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성낙(李成洛) 박사의 학위 논문이 그 전거(典據)입니다. 이 박사는 뮌헨의과대를 졸업한 뒤 프랑크푸르트대와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가천의대 명예총장으로 현대미술관회 회장과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이 박사는 총 519점의 조선 초상화를 정밀 분석한 결과 20가지 피부증상을 발견했습니다. ‘혹’ 또는 ‘점’이라고 하는 색소모반(色素母斑) 흑자증(黑子症-검버섯) 같은 생활에 지장이 없는 피부병변과 무모증 다모증 백반증 딸기코 흑색황달 공피증(鞏皮症-피부경화증) 홍반(紅斑)루푸스(lupus) 등 희귀 피부질환을 확인했습니다. 이밖에 피부병변은 아니지만 사시(斜視) 3점, 실명(失明) 4점 등 제 모습 그대로의 초상화도 있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조선 초상화 모두가 가감 없는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어진입니다. 이 태조 어진은 건국 초 영흥 평양 개성 경주 전주 등에 사당을 짓고 봉안했으나 변란과 전쟁 통에 모두 소실되고, 현재 남은 것은 전주 경기전(慶基殿) 소장본(1872년 제작)뿐입니다. 이 어진 역시 소실된 이전의 초상화를 그대로 본떠서 그렸으나 오른쪽 눈썹 위 0.7~0.8cm 크기의 작은 혹 모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습니다.

절대 권력자인 개국왕의 어진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에 비하면 이웃 중국과 일본의 초상화는 사뭇 다릅니다.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경우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본은 준수한 얼굴에 존엄과 권위가 넘치는 초상이지만, 다른 박물관 작품은 얼굴에 곰보 자국이 72개나 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실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얼굴은 하얗게 분장되어 있습니다. 게이샤[藝者]의 얼굴 화장과 흡사합니다. 간경변증 등 피부병변을 감춘 채.

또 다른 특징은 검은 점(21.77%)이나 검버섯(16.37%) 외에도 천연두 흔적(14.06%) 흑색황달(1.73%) 실명(0.77%) 사시(0.57%)처럼 숨기고 싶은 흔적조차도 있는 그대로 그린 점입니다. 대부분 왕명으로 그려진 초상화는 ‘한 가닥의 털(毛), 한 올의 머리카락(髮)도 달리 그리면 안 된다’는 대 원칙(1688년 숙종14년 승정원일기 명시)을 따른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정승 판서나 대제학 등 고위직을 지낸 선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논문에서 구한말 유학자 매천(梅泉) 황현(黃玹 1885~1910)은 오른쪽 눈이 사시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고종 어진을 그린 채용신(蔡龍臣)이 매천의 자결 후 생전의 사진을 보고 그렸지만 사시를 보이는 그대로 그렸습니다. 이는 조선 초상화가 개국 초부터 500년 동안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라는 제작정신을 어김없이 지켜왔음을 의미합니다. 자기과시나 은폐 의도가 용납되지 않는 선비정신을 유추할 수 있는 조선 초상화의 진면목입니다.

명나라 말 유학자 여곤(呂坤, 1536~1619)은 30여 년에 걸쳐 쓴 <신음어(呻吟語)>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눈에 먼지 하나가 들어가도 견딜 수 없고 [目不容一塵  목불용일진]
잇새에 티끌 하나만 끼어도 참지 못한다  [齒不容一芥  치불용일개]
원래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非我固有也  비아고유야]
그런데 어찌하여 마음속에                    [如何靈臺內  여하영대내]
그 많은 가시를 지니고서도                   [許多荊棘  허다형극]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인가            [却自容得  각자용득]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원칙은 신체발부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더 깊이 뿌리내려야 할 시대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게스트칼럼 / 박종문

창립 30년- ‘아멘’ 없는 남포교회

전기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일제 시대였지만, 시골은 물론 대도시 변두리 동네에서도 1950년대 중반까지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하여 ‘남포’라고 부르는 석유램프를 썼습니다.

1987년 10월, 미국 오레곤 주에 있는 카길 포틀랜드 지사로 발령을 받아, 우리 가족은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주말인 토요일 아침은 아파트 근처 공원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서  온 가족이 테니스를 즐겼습니다. 일요일은 뭘 한다? 차가 없으면 꼼짝 못하는 미국에서 가족을 버려두고 혼자만 골프를 치러 갈 수 없어서 우리는 시내에 있는 미국 교회를 빌려 예배를 보는 한국 교회에 다녔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친교실에서 교인들이 돌아가며 사 오는 도넛과 커피를 마시며 소식도 나누고 담소를 하는 것이 미국 생활의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미국에 있는 한국 교회는 툭하면 둘로 쪼개집니다. 그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만 교회가 두 동강 나 교인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교회에 다녀야 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일요일 아침이면 TV에서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방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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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는 루이지애나 주 베이튼 루지의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한 지미(Jimmy)라는 목사였습니다. 그는 인물도 준수할 뿐 아니라, 때론 성경을 던져가며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쇼맨십이 지나친 것 같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가서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묘령의 여자를 데리고 모텔로 들어가는 장면과 나오는 비디오 장면이 폭로되어 큰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다음 주 설교 때 아내와 함께 나와 “그 여자를 쳐다보기만 했다”고 울면서 회개한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교회는 ‘1년 설교 금지’라는 중형(?)을 선고하였으나, 그는 1년은 자신의 죗값으로 너무 가혹하다고 탄원했습니다. 그가 벌어들이는 연간 1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헌금에 눈이 어두운 교회는 결국 3개월로 감형했습니다. 지미 목사를 나락에 빠뜨린 사람은 또 다른 유명한 설교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로 들어온 막대한 기부금을 횡령한 것을 폭로하여 그 목사를 교단에서 축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지미 목사였으니 추악한 복수극이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도 ‘돈’과 ‘성’ 앞에서는 목사도 교회도 그런 추악한 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1989년,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 가족은 좋은 교회를 찾아 한동안 방황하였습니다. 압구정동의 몇몇 유명한 교회도 가 보았으나 너무나 큰 규모에 압도되어 설교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찾은 것이 봉은사 근처에 있던 P목사가 이끄는 K교회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굉장히 은혜로워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그 교회에 다닌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평신도회로부터 목사와 돈에 얽힌 비리를 폭로한 장문의 편지가 우송되어 왔습니다.

 여기도 아니다 싶어 다시 교회를 물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내는 친구의 권유도 있고, 포틀랜드 교회의 어느 분이 보내온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의 테이프를 들어 보고 설교 내용이 마음에 닿아,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상가 건물에 있는 남포교회를 찾았습니다. 이 교회는 좀 특이합니다. 86 아시안게임 때 선수들의 연습경기장으로 쓰던 체육관을 개조해 쓰는 교회로, 예배당 안은 어느 교인이 마련한 소박한 인조 꽃꽂이 외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십자가도 설교단에 새겨진 조그마한 십자가가 전부라서 눈여겨보아야 겨우 찾을 수 있습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붉은 색깔의 ‘성탄’이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장식이라면 장식이랄까?  

 교회에 갔더니 도대체 ‘환영’이 없었고, “참 잘 오셨다”고 말을 건네는 사람도, 출석부나 헌금 노트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등록교인이 8천 명에 육박하고, 주일 출석 교인이 4천 명이 넘는 작지 않은 교회이건만 교회 버스라고는 조문 예배에 갈 때나 쓰는 25인 승합차가 유일합니다. 모든 안내는 남자 집사들이 하며, “남을 전도하느라 애쓰지 말고 너나 잘하는 것이 전도”라는 담임목사의 말씀이니 참으로 보수적인, 거의 골동품 수준의 교회입니다. 규모의 대형화와 신도 수의 증가에만 집착하고, 금전문제로 고소를 하는 등 난리가 나고, 심지어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가 적지 않은 오늘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이런 보수적인 골동품 교회가 있는 것은 오히려 신선한 충격입니다. 

 주일이면 예배당 입구에서 주보를 받고,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넣고 들어가서 예배를 보고, 나오면서 예배당 출구에 서서 배웅하는 목사님 장로님과 악수를 하면 그만입니다. 물론 교인끼리의 친교와 구역 예배는 당연히 있습니다. 흔히 이 교회는 여러 교회를 섭렵하다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마지막 교회’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의 반 정도가 교회에서 수 킬로미터 반경에 거주하고 있고, 반 정도는 멀리서 오는 이상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교회 입구에서 봉사자들이 천막을 쳐 놓고 파는, 울릉도나 전라도의 개척교회를 위한 산나물과 미역, 합천 어느 개척교회를 위한 감자를 사거나, 동남아 어느 소수민족 교회를 돕는 데 지갑을 열어 돈 좀 펑펑 쓰라는 말씀을 일 년에 서너 차례 듣는 것이 돈에 관한 안내의 전부입니다. 교회를 키우지 않으니 자연 건축헌금이 없습니다. 기부금 내역은 목사님께 절대 보고하지 말라는 엄명에 기부금을 내고도 생색을 못 내니, 기부금을 낸 분들은 봉투에 자기 이름이나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급속한 노령화로 십일조조차 줄어든 탓에 예산이 부족하여 예배 횟수도 줄이는 등 최근 구조조정을 하였습니다. 속된 말로 장사를 잘 못하는 교회로, 앞으로 교회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합니다. 

 휴가 중이었던 담임목사를 대신하여 설교를 하신 초청목사님께서 설교 중 ‘아멘’ 하여야 할 대목에서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는 교인들이 섭섭하여서인지 “이 대목에서는 '아멘' 하셔야지요”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딱 한 교인만이 설교 중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멘' 하다가 혼자서만 하는 것이 쑥스러워 다른 교회로 옮기고 난 후 이 교회에서 '아멘'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절간처럼 조용한 교회입니다. 주일 낮과 수요 저녁 예배, 새벽 예배, 크리스마스 날 외에는 일 년 내내 다른 예배나 금요 철야 예배, 신년 예배도 없고 어지간한 큰 교회라면 가지고 있는 기도원도 물론 없으며 기도원에 가는 교인조차도 드뭅니다.  박 목사님의 설교는 독특합니다. 열이 나면 때론 ‘썅’ ‘죽일’ ‘새끼’ 같은 비속어도 서슴지 않는 독설(獨說),-독특한 설교-를 하시면 교인들은 그런 설교에 익숙하여 그럴 때마다 폭소를 터뜨립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남서울교회에서 부목사로 목회를 하시다가 개포동에서 개척교회를 여시며 ‘남’과 ‘포’를 따온 것이 ‘남포교회’라는 이름의 유래이며 영어로는 Lamp라고 표기합니다. 교회 이름을 남포라고 한 데는 발음이 같아서도 그러하지만, 사회의 등불 역할을 하고자 하는 목사님과 교회의 뜻이 그 속에 녹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난 1월 11일에는 교회 설립 30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에 맞추어 금년 말 조기 은퇴를 하시기로 한 박 목사님과 교회는 새로운 담임 목사를 초빙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그날에는 우리 교인 모두는 교회가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아멘’을 외칠 것입니다.    

*카길(Cargil Incorporated)은 1865년 설립된 미국의 개인 소유 다국적 기업입니다. 세계 주요 곡창지대 물류거점에 농산물 창고와 가공, 물류시설을 확보하여 밀 옥수수같은  곡물을 저장, 가공, 판매하는 회사입니다. 가축사료 제조, 과일주스 원액 생산, 식품 첨가물 판매도 합니다. 연간 매출이 1,000억 달러에 육박하는 곡물 메이저입니다.

필자소개

유운(遊芸) 박종문

1946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농대 농화학과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다. 1971년, 세계 제1의 곡물 메이저인 카길 한국지사에 입사, 2002년 한국 지사장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30여 년간 각종 농축산물과 원염(소금), 원유, 석유류 제품 등 원자재와 선박 용선, 금융 등 다양한 상품을 다루었다. 은퇴 후 중소기업고문으로 일하며 아마추어 수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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