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고 긍정적인 새해를 바랍니다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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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긍정적인 새해를 바랍니다

2015.01.19


옛 성인(聖人)이 나이 40에 불혹(不惑)이고 50에 지천명(知天命)이라 말하신 것을 배웠을 때 무척 감동한 기억이 있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나이 별로 요즘 세태의 감각을 상징적(象徵的)으로 표현한 패러디 글을 발견하여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40~60대는 빼고 일부를 옮겨 보겠습니다.

70세의 항목에 ‘길흉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무례가 되지 않는 나이이며, 대통령 이름을 그냥 불러도 괜찮은 나이’라 한 것은 애교가 있었으나, 72세에 ‘서서히 하늘과 가까워지는 나이’라 한 것은 상당히 교훈적이면서 겁주는 글이라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에 더욱 가까운 항목을 보니, 90세는 ‘주민등록 번호를 잊어버리는 나이,’ 92세는 ‘게임의 룰을 지킬 수 없는 나이,’ 그리고 93세는 ‘한국말도 통역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나이’로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나이로는 새해에 92세가 되었지만, 아직 그런 처지까지는 가지 않은 저를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상당히 생각하는 바 있었습니다.

우선, 주민등록 번호를 잊을 정도는 아니지만, 기억력이 무척 떨어지고 두뇌의 순발력이 둔해져, 글 쓰는 데 불편이 많습니다. 잘 알던 지명이나 꽤 가까운 사람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 당황할 때가 많아졌습니다. 몸뿐 아니고 두뇌의 움직임도 둔해진 것입니다.

평소에 큰 병을 앓은 적이 없고, 나이가 들면서 매사에 절제를 지키려 노력해 온 저는 건강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참에 지난해 거의 3개월을 건강부진으로 고생한 결과, 이제는 건강에 관한 자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때 ‘인생 50’이라는 말이 정설처럼 통용하던 우리 사회가, 생활여건의 향상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나 지난 연말의 정부 발표에 따르면 남자는 78.5세, 여자는 85.1세로, 평균 81.9년으로 높아졌습니다. 

‘인생 100’이라는 말이 허망한 구호가 아니고 현실감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단순한 기대수명 외에 ‘건강수명’이란 말을 강조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죽기 얼마 전까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인생을 즐기다가 가자는 생각이 무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존엄사(尊嚴死)와 안락사(安樂死) 그리고 삶의 질(QOL - Quality of Life)에 관한 논의도 활발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호스피스 운동이 확산되어, 특히 말기 암 환자나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의 경우, 이런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본인이나 간호하는 가족을 위해서도 이 존엄사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 더욱 활발한 논의와 대책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가 법으로 안락사를 금하고 있습니다. 자기 환자의 안락사를 도운 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례가 여러 번 일본이나 미국에 있었습니다. 안락사를 위해 이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나라나 주(州)로 이주하는 예도 보도되었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안락사를 인정하는 나라는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등 일부 유럽 국가와 오레곤 등 미국의 4개 주뿐이고, 나머지는 주로 종교 상 이유 또는 자살 방조에 악용될 가능성 등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 이론이 점점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죽음을 앞둔 환자에 대하여 의료 수단으로 무의미한 연명조치를 취하는 관례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안락사에 대한 찬성 의견도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일정 시 다니던 대학의 동창회 정기 모임이 수년 전에 끝나고, 2~3년 전까지 간간이 있었던 개별적 식사 모임도 중지되었습니다. 30년 이상 계속된 고등학교 동기생 월례회도 지난해 하반기부터 부정기로 변했습니다. 

일본에 살던 초등학교 동기생과는 수시로 전화 연락을 해왔으나 지난 연말에 부고가 날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것은 10년 남짓 전으로, 도쿄를 중심으로 3~4일 간 여행을 하며 회포를 풀었습니다. 

지난해에는 유난히 많은 동년배의 친구나 지기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들과의 많은 추억이 한때 저를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친구 나 가깝게 지내는 인생 후배가 주위에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과의 정의(情誼)를 더욱 소중히 간직하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 부모님이 손주 이름을 들먹이며 그 애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살아야 할 텐데 라고 한탄조로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났습니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뭔가를 배우며 뜻있게 살고 싶습니다. 물욕이 아닌 정신적인 욕구가 아직도 저를 채찍질합니다. 

한때의 멘토 한 분이었던 영문학자이고 수필가인 피천득 교수가 즐겁게 사시다 97세에 세상을 떠났을 때, 저도 그 정도는 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96세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건강한 모습으로 한 시간 강연하시는 것을 보고,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저 나이까지만이라도 배움과 사회봉사의 뜻을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건강하고 즐겁게, 배우는 자세로 새해도 살아갈 생각입니다. 그러나 종점이 보이는 인생이라, 과욕은 결코 피할 각오입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게스트칼럼 / 양광모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빌 게이츠가 고등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10가지 조언은 1996년 9월 19일, 미국 교육자 찰스 시키즈(Charles J. Sykes)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Some rules kids won't learn in school)’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첫 번째 조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라(Life is not fair; get used to it.).”

찰스 시키즈의 말처럼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빌 게이츠의 인생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며 20대의 나이에 마이크로 소프트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곤 별다른 실패나 역경 없이 무려 560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보유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죠. 이처럼 인생은 공평하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불공평합니다. 

만약 당신이 20,30대의 나이라면 이런 사실에 분노하거나 잡다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일도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혹과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었다면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말에서 삶의 지혜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슬픈 일이 닥칠 때마다 ‘오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일까?’라고 말하지만 기쁜 일이 일어났을 때도 똑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 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2002년 6월 3일, 나는 야심만만한 꿈과 원대한 포부를 품고 출마한 지방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한 후유증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죠.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려니와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인생과 세상의 불공평을 원망하며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자나 깨나 내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불운이 찾아온 것일까?’라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친구 한 명이 전화를 걸어와 자신과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아무런 대책이 없던 나는 강남역 인근 사무실로 출근하였고 리모델링이 진행 중이던 한 대형빌딩의 상가와 오피스텔을 분양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부동산경기가 가라앉아 있던 시기라 그리 밝은 전망은 아니었는데 며칠 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점심시간 무렵, 한 중년 남성이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건물 한 층 전체를 분양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곤 2개월 후,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정식으로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대략 70억원이 넘는 분양금액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억’에 가까운 돈이 인센티브로 지급되었습니다. 정말 이 당시의 나로서는 하늘의 도움과 같은 천만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선거 출마를 위해 대출을 받았고, 여기저기 주변 사람들에게 급전을 빌렸기 때문에 금전적인 어려움이 심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계약 덕분에 여기저기 채무를 정리할 수 있었고, 모처럼 삶의 여유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머릿속에 ‘왜 하필이면 이런 행운이 나에게 찾아온 것일까?’라는 질문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내가 기울인 노력의 결실, 또는 그동안의 불운한 삶에 대한 보상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공평하지 못한 태도였습니다. 인생에서 행운이 찾아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불운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행운이 찾아오는 것을 불평하지 않는다면, 불운이 찾아오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훗날에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는 《수레바퀴 밑에서》,《데미안》,《유리알유희》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청소년기는 대표적인 질풍노도의 시기였죠.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학교를 뛰쳐나왔고, 15세 때는 실연의 아픔으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이후 신경쇠약으로 정신요양원에 입원했으며,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시계부품 공장 견습공과 서점 점원을 전전하였습니다. 다행히 30대 무렵에는 문학적 성취를 이루며 큰 명성을 얻게 되죠. 

그렇지만 40세가 되던 1916년부터는 아버지의 죽음, 막내아들의 중병, 아내의 정신병 악화와 입원, 아내와의 이혼, 재혼과 두 번째 이혼, 자신의 신병(身病) 등 수많은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당시 헤세가 쓴 대표적인 작품이 ‘새는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장으로 유명한 《데미안 Demian》입니다.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최고의 명예를 차지한 헤세,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삶이 밝을 때도 어두울 때도, 나는 결코 인생을 욕하지 않겠다.” 

인생을 살다보면 생각지 못했던 불운과 불행, 슬픔이 찾아옵니다. 정반대로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과 행복, 기쁨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공평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불운이라고 해서 불평할 수 없으며, 행운이라고 해서 당연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없습니다. 삶이 밝을 때나 어두울 때나 결코 인생을 욕하지 않으며 그저 담대하게 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깨뜨려야 할 또 하나의 알이요, 세계일 것입니다. 지금 “인생은 공평해야 한다.”는 알에서 깨어나세요.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말 하나 덧붙여 놓습니다. 자주 막막하고 이따금 먹먹해도 늘 묵묵하게.  

필자소개

양광모

시인 작가. 경희대 국문과 졸. SK텔레콤 노조위원장, 한국기업교육협회장, 청경장학회장 역임. 2010년 한국HRD 명강사대상 수상. 시집 <나는 왜 수평으로 떨어지는가>, <한 번은 시처럼 살아야 한다>, <그대 가슴에 별이 있는가>, <내 사랑은 가끔 목 놓아 운다>, <썰물도 없는 슬픔>. 인생지침서 <비상>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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