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 대탈출’에서 ‘환희의 송가’가 들려온다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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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대탈출’에서 ‘환희의 송가’가 들려온다

2014.12.29


국가보훈처가 故 현봉학 박사를 민간인 처음 2014년12월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함에 이글을 올립니다.

현추모(현봉학을 추모하는 모임) 대표 이성낙


64년 전 1950년 12월 24일, 흥남(興南)부두에 집결한 수많은 피란민을 태운 마지막 수송선 LST가 항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부두는 물론 흥남 시가지 여기저기에서 무서운 폭음과 함께 거대한 검은 폭연(爆煙) 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습니다. 배에 탄 피란민들은 이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일컬어 ‘흥남 대탈출’ 일명 ‘흥남 철수 작전’이라고 합니다.

‘흥남 대탈출’은 우리 한반도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사(戰史) 중에서도 특별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당시 28세의 젊은 의사 현봉학(玄鳳學, 1922-2007, 咸興 출생) 박사가 우뚝 서 있습니다(1944년 세브란스의대 졸업, 1947-1949년 미국 버지니아 주립의대 임상병리과 수련, 1950년 세브란스의대 임상병리 강사).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드물던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제10군단장인 에드워드 아몬드(Edward M. Almond, 1892-1979) 소장은 우연히 미국에서 유학한 젊은 현봉학 박사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전속부관(통역관)으로 그를 차출해 유엔군의 동부 전선 그리고 그의 고향 지역이기도 한 흥남-함흥-장진호(長津湖)로이어지는 전투에 투입합니다. 그때 현봉학 박사는 미국 유학에서 갓 귀국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해병대 소속 군의관으로 자원입대한 상태입니다(소아마비로 군복무 면제대상인데도). 그렇게 아몬드 소장과 현봉학 박사의 만남으로 ‘흥남 대탈출’이라는 역사적 드라마는 시작합니다.

전장에서 북진하던 유엔군은 11월 중순경 전혀 예기치 못한 돌발 사태에 직면합니다. 인해(人海)전술로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전 개입하면서 전황이 급변하자, 유엔군 사령부가 전선에서 퇴각할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여기서 ‘흥남 대탈출’의 드라마가 연출됩니다. 무엇보다 미군이 굴욕적으로 참패해 퇴각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민간인을 구출하는 작전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의의가 있습니다. 특히 민간인의 철수를 돕기 위해 군인들이 자기 목숨과도 같이 여기는 작전용 중장비를 수송선에서 내려놓고 그 공간에 더 많은 피란민을 태워 수송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오로지 인종, 국경, 종교, 이념이라는 모든 벽을 훌쩍 뛰어넘은 인간사랑(humanity)이라는 큰마음이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대서사극(大敍事劇)이라는 점에 각별함이 있습니다. 역사적 모뉴멘트(monument)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흥남 대철수 작전은 엄청난 수의 피란민을 구출했다는 사실 하나로도 세계사에 남을 역사(役事)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모세(Moses)가 이집트 땅에서 노예로 착취당하며 살던 동족을 이끌어낸 민족 大이동이란 거사에는 6만 명이라는 수치가 뒤따릅니다.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로 잘 알려진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1908-1974)가 나치 수용소에서 구해낸 유대인의 수는 약 1,200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현봉학 박사는 숨 막히는 전쟁터에서 10일간(1950 11. 14-24)의 짧은 기간 동안 10만 명의 피란민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는 실로 특기할 만한 사실입니다.

10만이라는 숫자 자체가 이미 감동적이지만 현봉학 박사가 그 같은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집요하게 설득하고 또 설득한 끈기와 노력, 군단장인 아몬드 소장과 그의 참모부장 에드워드 포니(Edward H. Forney, 1909-1965) 대령 그리고 유엔군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사령관의 이해와 협조가 없었다면 아주 다른 역사의 궤도를 밟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젊은 현봉학 박사의 피란민에 대한 인간 사랑의 호소를 맥아더 사령부가 받아들여 그의 동의 아래 아몬드 군단장의 흥남 철수 작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본부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흥남부두에서는 군수물자를 하역하게 하면서 부산기지에서는 한국해군 소속 수송선 LST 3척을 흥남으로 배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일본으로부터 다른 수송선 7척이 흥남으로 급파되었다고 합니다.〔김성은(金聖恩(1924-2007), 당시 해병대 부대장, 훗날 국방장관)〕

그러나 흥남 대탈출 작전은 미국인에게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 즉 ‘잊고 싶은 전쟁’으로 몰고 간 장진호 전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동절기 북한 산악 지대의 지형적 악조건에다 인해전술로 포위망을 좁히며 몰려오는 중공군과 싸우기도 버거운데, 때마침 10년 만에 닥쳐온 영하 30℃의 살인적 추위(暴寒)로 수많은 동사자(凍死者)를 포함해 7,0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희생이 컸던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은 보름간의 악전고투 끝에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철수하는 미군들의 마지막 집결지는 우연치 않게 ‘흥남’이었습니다.

흥남 부두라는 좁은 공간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하는 10만여 명의 미군과 수많은 軍 중장비들 그리고 피란민 10만 명이 집결했으니 얼마나 혼잡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형언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군사령부는 약 10만 명에 이르는 9만 8,000명을 수송선으로 피란시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필자는 장진호 전투에서 참패한 엄청난 아픔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민간인 10만 명을 구출한 ‘흥남 철수 작전’이란 대서사극으로 전투를 마무리했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의 한 장(章)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흥남 대탈출 작전’이야말로 인간이 빚어낸 장엄한 드라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역사적 드라마를 떠올릴 때면 배경음악으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 그중에서도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Alle Menschen werden Brueder, wo dein sanfter Fluegel weilt)”라는 소절이 더욱 가깝게 들려오는 듯싶습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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