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의 추억 [방석순]

www.freecolumn.co.kr

명태의 추억

2014.12.18


본격적인 추위와 함께 명태의 계절이 시작됐습니다. 요사이처럼 추운 겨울날 가장 인기 있는 메뉴가 바로 동태찌개입니다. 동료들과 어울려 보글보글 끓는 동태찌개에 소주 한잔 곁들여 먹는 점심은 잠시나마 세상 시름을 잊게 합니다. 명태 알로 담근 명란젓, 창자로 담근 창난젓은 밥도둑이나 다름없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에 젓갈 한 점 올려 김으로 싸서 입안에 넣으면 황홀하게도 바다의 맛이 우러납니다. 동태를 적당히 말려 부드럽게 쪄낸 코다리찜이나 덕장에서 꽁꽁 얼었다 풀린 북어포무침은 더없이 훌륭한 술안주가 됩니다. 또 술이 과한 다음 날 숙취 해결엔 북어국이 제격입니다. 이렇듯 명태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버리는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바다의 소[牛]로 비유될 만합니다. 제사상에도 빠짐없이 북어포가 오르는 걸 보면 명태는 예전부터 꽤 지체 높은 어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명태, 하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절로 떠오릅니다.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나 함흥, 흥남서 살다가 엉겁결에 남으로 피란 내려온 어머니의 가장 자랑스러운 메뉴 한 가지는 가자미식해였습니다. 그러나 배가 노릇노릇하고 자그마한 크기의 맘에 드는 참가자미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던가 봅니다. 그런 때 어머니는 명태를 사다가 무채, 좁쌀, 양념을 버무려 명태식해를 만들어냈습니다. 잘 익힌 명태식해의 맛은 가자미식해 못지않습니다. 어머니는 김장 때도 다른 젓갈은 거의 쓰지 않고 양념과 함께 생태 토막을 집어넣곤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표’ 김장김치 국물은 늘 생선 비린내 하나 없이 달고 시원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하나, 통쾌 무비의 명곡 ‘명태’도 생각납니다.

감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 치고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元山)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王)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이 가곡은 함흥 태생의 변훈(邊焄; 1926~2000)이 6·25 동란 중 양명문(楊明文; 1913~1985)의 시를 받아 작곡했다고 합니다. 1952년 부산극장에서 바리톤 오현명(吳鉉明; 1924~2009)의 노래로 처음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래하는 중에도 여기저기 객석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나더니 이튿날 신문에는 ‘그것도 노래냐’ 하는 혹평이 실렸더랍니다. 그 바람에 실망한 변훈은 한동안 작곡을 접고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오현명의 ‘명태’를 듣노라면 세기적 베이스 샬리야핀(Fyodor Shalyapin, 1873~1938)이 부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orgsky; 1839~1881)의 가곡 ‘벼룩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어쩌면 변훈이 그 영향을 받아 지은 노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마추어 감상가인 제 귀엔 세 콤비가 우리의 정서를 담아 빚어낸 ‘명태’야말로 ‘벼룩의 노래’를 능가하는 명가곡으로 들립니다.

명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생선입니다. 2010년에는 32만 톤, 2011년에는 28만 톤, 2012년에는 30만 톤을 소비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국내 소비 전체 어류 가운데 당당 1위, ‘국민 생선’이라는 말이 실감 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의 전량이 나라 바깥 원양에서 입어료를 내고 잡아오거나 수입한 것들입니다. 벌써 오래전 우리 영해에서는 씨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광복 전까지도 명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생선이었습니다. 1940년 어획량이 27만 톤으로 당시 총어획량의 16%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옛날 이맘때면 함경도와 강원도 어항들은 명태잡이 어선들의 출어로 부산스러웠을 것입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함경북도 신포가 특히 유명했답니다. 일제 치하 굶주리던 시절에도 명태잡이 배가 드나들던 그곳에선 하루 세끼 해결이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광복 후 남북 분단으로 함경도 앞바다가 가로막히며 한때 명태 어획량이 1만여 톤으로 떨어졌다가 그 후 강원도 이남에서만도 연간 7만 톤이 넘게 잡혔습니다. 그러던 명태가 1990년대 들어서며 1만 톤 미만, 2000년대에는 100톤 미만으로, 2007년 이후 현재까지는 연간 1~2톤으로 급격히 줄었습니다.

동해의 명물 명태의 씨가 마른 것은 치어의 남획 탓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1970년 길이 27㎝ 이하의 어린 명태, 노가리 잡이가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노가리 잡이가 극심했던 1970년대에는 전체 명태 어획량의 90% 이상이 노가리였다고 합니다. 미래의 먹을거리를 일찌감치 결딴내버린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기후 온난화가 명태 실종 상태를 가속화했습니다.

동해에서 명태가 사라지면서 우리 어선들은 저 멀리 베링해까지 원정 조업에 나서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저희들이 먹지도 않는 생선이건만 야박하게도 매년 4만~5만 톤으로 쿼터를 한정하고, 입어료를 받고서야 우리 어선들을 받아들입니다. 이렇듯 가장 많이 먹는 생선이 태부족이니 당연히 수입량에서도 명태가 연간 30만~40만 톤으로 1위입니다. 명태가 사라진 동해, 거의 전량 수입산인 명태, 이게 오늘날 ‘국민 생선’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입니다.

올해 해양수산부는 명태 자원 회복을 위해 동해수산연구소, 심층수센터, 강릉원주대 등 3개 연구기관과 함께 '동해 명태 살리기‘ 사업을 펼쳤습니다. 살아 있는 명태를 구해 수정란을 확보한 후 이를 인공부화시켜 치어를 동해에 방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명태 한 마리당 50만 원의 현상금이 걸렸어도 어민들이 잡아 넘긴 명태는 겨우 200여 마리, 그중 수정란의 기대를 걸 만한 것은 20마리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북한과 러시아, 일본에서도 살아 있는 명태와 수정란을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은 듯합니다.

지난 3월 해양수산부 살림을 맡은 이주영 장관은 취임 직후 “우리 어선이 서해와 동해의 경계를 넘어 조업할 수 있도록 해 보겠다”며 의욕을 보였습니다. 또 동해의 명물 명태를 되살리기 위해 남북 합작으로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아쉽게도 이런 꿈들은 곧이어 그를 덮친 세월호 격랑 속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취임 후 불과 한 달 만에 세월호 사건이 터지며 그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멱살까지 잡히는 수난 속에 진도 해역에 발이 묶였습니다. 한 해를 결산해야 할 마지막 12월 초하루에는 명태잡이 어선 501 오룡호가 베링해에서 침몰했습니다. 뜻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재난의 악몽 속에 올 한 해를 다 보낸 셈입니다.

생각해보면 남과 북이 손잡고 벌일 만한 사업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개성공단에서 비롯된 산업협동을 더욱 확대해 주요 어장에서의 공동 조업, 항만과 항로의 개방, 철도 개통 등으로 쌍방의 이익을 증대,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 군사적 대립이 심각할수록 오히려 문화 학술 경제적 교류의 길을 적극적으로 뚫어 긴장을 완화하고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나가는 노력이 절실해 보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언한 휴전선 일대의 평화공원 조성 역시 이 같은 선제적 노력 없이는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선 새해엔 이주영 장관의 꿈처럼 남북의 항로와 어장이 열리고, 남북 합작으로 ‘국민 생선’ 동해의 명태 되살리기 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엇 하나 마땅히 이뤄놓은 게 없는 마당에 남의 기술, 북의 인력이 한 배를 타고 푸른 물결을 헤치며 명태 되살리기에 나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