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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을 축하함?
2014.12.15
필자의 이름이 뜬금없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후배 아나운서의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아나운서실에서 가장 무서운 선배로 필자를 꼽은 것이었습니다. 신입 아나운서로 교육을 받는 중에 필자의 엄한 태도 때문에 몇 번을 울었다는 것인데, “저렇게 예쁜 아나운서를 울린 선배가 도대체 누구냐?”로 논란이 시작되면서 필자가 검색어 순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습니다.사실 방송의 내용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후배 아나운서의 ‘평소 말투가 쏘시는 무서운 선배’라는 표현에 필자의 아내는 필자보다 더 섭섭한 마음을 비쳤습니다. 필자가 신입 아나운서들에게 들인 공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아내는, “당신은 신입 아나운서가 들어올 때마다 그렇게 공을 들여 교육을 하고 신입 아나운서가 첫 방송을 할 때면 새벽같이 나가서 도와주었는데 그 결과가 이거 밖에 안돼?”라며 속절없이 속상해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필자의 편이 되어 주는 아내가 바라보는 남편과 업무상 후배들에게 따끔하게 코치를 해주는 필자의 모습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입니다. 신입 아나운서가 입사하면 온 방송사가 주목을 하게 됩니다. “이번에 뽑힌 친구들은 어때?”, “실력은 있어?”부터 시작해서 “누구누구는 정말 예쁘더라.”, “언제쯤 실전에 쓸 수 있을까?”까지 온갖 질문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간의 경험에 비춰볼 때, 방송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즉, 신입 아나운서가 들어오면 이 친구들이 아나운서 선배의 눈에 흡족할 정도로 교육이 이뤄질 때까지 상황이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길어야 석 달의 교육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방송현장에 투입되는데 시간은 부족하고 갈 길이 먼 경우에는 당연히 교육의 강도가 높아지게 됩니다. 첫 방송을 훌륭히 마치면 전도유망한 아나운서가 됩니다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꽤 험난한 길을 감수하면서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비해야 합니다. 교육을 담당하는 선배의 입장에선 교육기간에 흘리는 눈물이 방송에 투입된 후 인정받지 못해서 뒤에서 쓸쓸히 흘리는 눈물보다 훨씬 덜 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끔은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냉정하게 평가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방송에 투입할 때도 자신의 역량에 맞는 방송에 투입하려고 노력합니다. 외모는 훌륭하나 발음과 억양이 불안한 친구는 긴 시간을 내레이션하는 방송에 투입하지 않게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실력이 모자라면 자주 실수를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본인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신입 아나운서의 성공적인 데뷔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배려를 하는 것이 선배들의 임무입니다.하지만 졸지에 ‘쏘는 스타일로 말을 하는 무서운 선배’가 되어버린 필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사람은 제 아내 말고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내용을 보지 않고 결과만 보는 것 같았습니다. “선배님, 어제 검색어 순위에 올랐어요.”, “어제 방송 보셨어요? 기사도 여러 개 났어요.”, “축하합니다.”가 필자가 건네받은 인사의 대략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합니다. 이를 미디어 이론으로는 ‘선택적 지각 이론’이라고 합니다. 필자의 아내는 기사의 내용만 보았을 것이고 사람들은 필자가 기삿거리가 된 것만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에 오른 것을 더 의미 있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필자가 후배 덕에 검색어 순위에 오른 행운아처럼 비쳤을 것입니다. SNS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큰 화두는 ‘존재감’인 것 같습니다. 최근의 한 자동차 광고의 카피입니다.
남자에겐 없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감각이 있다 존·재·감.강인한 눈빛, 자신감 있는 행동, 급이 다른 존재감을 드러내다. 올 뉴 쏘X토.
마치 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존재감이 크게 향상될 것 같은 느낌을 팍팍 주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존재감에 대한 욕망을 이 자동차가 충족시켜줄 거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존재감이 있다는 것은 이름이 있다는 것이고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면 영향력이 생기고 영향력이 있다는 것은 권력과 가깝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고계의 통설 중에 ‘Any publicity is good public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찌 됐든 알려진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습니다. 즉, 과정과 내용에 관계없이 일단 알려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한 해에 수백 개의 아이돌 그룹이 생기지만 대부분 이름도 얻지 못하고 해체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어찌됐든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라디오 청취율 1위를 하고 있는 ‘컬투쇼’를 듣다 보면 게스트의 이름을 실시간 검색어 1위로 만들어 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가 있습니다. “전국의 백수 여러분 지금부터 녹색창에 XXX를 쳐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컬투가 얘기를 하면 놀랍게도 몇 분 후에 XXX씨가 검색어 1위에 오릅니다. 청취자의 힘으로 검색어 1위를 만들어 내는 순간입니다.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것이 하나의 이슈이면서 오락인 경우입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보면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존재감의 중요성을 느끼면서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감을 좇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은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신입 아나운서 교육하다가 ‘쏘는 스타일’로 얘기하는 바람에 후배의 눈물을 쏙 빼게 만들어서 실시간 검색어 순위의 상위권에 오른 것이 과연 ‘축하’받을 일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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