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베 총리 는 왜 총선을 택했나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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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베 총리 는 왜 총선을 택했나

2014.12.01

일본은 내일(12월 2일) 공시(公示)하여 14일에 국회 하원인 중의원(衆議院) 총선거를 실시합니다. 그 대세는 당일 자정 전에 판명됩니다. 이변이 없는 한, 절대안정 의석을 가졌던 현 총리 아베 신조(安倍晉三) 여당 세력의 승리가 예상됩니다.

국회에 안정 세력을 가진 총리가 하원 의원 임기가 절반이나 남아 있는 이 시기에, 왜 ‘기습’ 해산이라는 정치 도박을 하느냐, 이것이 선거결과 예상보다 더 흥미를 끄는 대목입니다. 2년 전 선거에 대승하여 정권을 탈환하고 승승장구(乘勝長驅)하던 그의 인기가 내리막인 것이 주된 원인입니다.

한때 그의 ‘아베노믹스’라고 이름 지어진 경제정책이 반짝 효과를 내기는 했지만, 명년 10월로 계획된 소비세 10%로의 추가 인상을 앞두고, 그의 인기는 4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이 추락이 위험선까지 도달하기 전에 의석 몇 개를 희생해서라도 4년의 정권안정을 꾀하고, 잘하면 2020년의 도쿄 올림픽 때까지 집권하자는 것이 그가 이번 정치 도박을 건 이유입니다.

일본 총리의 국회 해산권은 이렇게 정치적 이유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1947년 5월에 지금의 헌법이 채택된 이후 4년 임기를 제대로 마친 중의원은 단 한 번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전부 도중 해산으로 끝났습니다.

2012년 8월, 야당이었던 자민당은 당시 여당인 민주당과 10년 이상 침체한 일본 경제를 살리기 위해, 당시 5%였던 소비세를 2014년 4월에 8%로 인상하고 2015년 10월에 10%로 인상하는 데 합의하였습니다. 그 뒤 2012년 12월의 총선에서 자민당이 대승하여 아베 총리의 새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 여야 합의에 의한 소비세 8% 인상이 아베노믹스 정책의 일환으로 집행되고 명년 10월에 이를 10%로 다시 올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효과가 있던 아베의 엔저(円低)를 비롯한 경제 정책이 일부 대기업에만 이익을 주고 뚜렷한 효과를 내지 못 한 데다, 무리한 외교ㆍ안보 정책 등의 강행으로 여당 인기기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야당에 뚜렷한 지도자가 없고 세력이 지리멸열(支離滅裂)한 지금이면, 선거에서 아직은 승리할 자신이 있으니, 선거 기반이 약한 여당의 젊은 의원 몇 사람이 희생되더라도 과반수 확보엔 어렵지 않을 거라는 정치적 계산이 아베 총리를 선거로 몬 것입니다.

국회 해산은 총리의 전권(專權)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당리당략(黨利黨略)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당 내외에 많았으나, 금년도 3분기의 경제성장이 전 분기에 이어 마이너스 성장으로 나타나자 아베는 우려했던 대로 지난달 28일에 정식으로 중의원을 해산하였습니다.

여당 중진 중에서도, 총무회장이라는 중책을 지난 9월의 개편에서 세 번째로 맡은 원로 지도자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씨는 아베노믹스의 성공에는 명년 10월의 소비세 인상이 필요하며, 중의원 해산을 당략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지난 4월의 소비세 증세는 대기업과 부유층을 제외한 여당 지지층에서조차 인기가 없어, 명년의 소비세 인상은 아베노믹스 성공을 위해서는 절대 필요한 정책이었으나, 정권 유지에는 매우 위험한 걸림돌이었습니다. 경제평론가인 오기하라 미치코(萩原道子) 여사는, 경기가 나쁘면 세 인상을 유예할 수 있다는 소비세법 조항이 있으니, 굳이 국회를 해산할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아베 총리의 정치적 판단으로 이번 선거가 실현되었으며, 정치 평론가는 대체로 아베 총리의 이 모험을 수긍합니다. 그러나, 아베의 이 결정은 경제 이외의 정책에 대한 유권자의 불만을 무시해서 불안하다는 설이 선거 결정 후 점점 힘을 얻고 있습니다.

아베노믹스 자체의 성과 여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 집단적 자위권, 특정비밀보호법, 원자력발전의 부활,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화 등으로 아베 정권에 등을 돌린 유권자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입니다. 이런 정책의 비판자는 원래 자민당을 반대하던 지식층이 많지만, 원전 반대 세력에는 무시할 수 없는 여당 표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기 있던 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등이 주도하는 원전 반대 운동은 후쿠시마 대지진과 2차대전 시 원자탄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는 일본 유권자의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이를 무시한 아베 총리의 정치 감각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습’을 당해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한 야당 진영도 차츰 전열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정원 475석의 중의원에서 55석뿐인 제1야당 민주당이 42석을 가진 유신의당과 제휴하여 여당 과반수 선 저지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유권자의 약 60%가 총선거의 타당성을 의심하는 심리를 이용하고, 계속되는 경제 침체와 불안한 국제 고립화를 공격하겠다는 작전입니다.

여당은 지난 2년에 새로운 고용이 100만 생겼다 하지만, 야당인 민주당 대표 가이에다 반리(海江田万里)는 정규직은 9만 증가했고 비정규직만 147만 늘었다고 비난하며, 서민이 느끼는 경기 회복 실감은 없다고 아베노믹스를 공격했습니다.

총선거 비용으로 631억 엔 (약 6,310억 원)을 예비비에서 지출하는 각의 결정 후 부총리 겸 재무장관 아소 다로(麻生太郞)는 기자에게 선거는 총리 전관사항(專管事項)이라고 예비비에서 지출한 사유를 설명했습니다. 재해 보상 등 쓸 곳이 많은 이때, 700억에 가까운 거액을 쓴는 총선 비용 지출에 대해 불평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베의 정치 도박 결과가 과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합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게스트칼럼 / 안건훈

내 삶에 닥친 죽음의 순간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죽음이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곤 합니다. 또 죽을 뻔한 일을 겪기도 하죠. 실존철학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따르면, 죽음이란 ‘자기만의 것이며(홀로 맞이하는 것이며), 확실하며(틀림없이 오는 것이며), 무규정적이며(죽음 후의 세계를 정의할 수 없으며), 결코 다시 경험할 수 없으며(한 번으로 끝나며),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가능성’입니다. 죽음의 특징을 비교적 설득력 있게 규정한 철학자라 여겨집니다. 나는 이제껏 70년 동안 살아오면서 세 번에 걸쳐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1951년 1월 30일 오전에 있었습니다. 겨울 난리 때 북한군(인민군)이 우리 동네에 들이닥쳐 피란을 미처 가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과 더불어 지내야 했습니다. 우리 집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우리 6남매가 그랬습니다. 그날 유엔군 비행기들이 우리 동네를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침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할 즈음에 비행기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곧 이어 벼락 치는 소리가 뒤따르더라는 것입니다. 마당 흙이 갑자기 뒤집어지고 집안 이곳저곳에 뿌연 먼지가 치솟았습니다.

어머니는 비행기 폭격임을 직감하고, 식구들을 재빨리 모아 대청마루 뚜껑을 열고 지하실로 피신시키셨습니다. 그때 지하실로 피신한 사람들은 우리 식구 말고도 뒤따라 들어온 인민군들도 있었습니다. 지하실 바깥은 비행기 폭격으로 폭탄 터지는 소리, 집이 무너지는 소리, 비명 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하나님께 울부짖으면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인민군들 가운데 누군가가 이런 기도에 대해 뭐라고 하자, 할머니께선 “야, 이 녀석들아, 너희들도 살고 싶으면 함께 기도해”하고 호령하니, 그들도 모두 두 손을 모으고 할머니처럼 기도를 올렸습니다. 제법 규모가 컸던 우리 집은 이렇게 해서 잿더미가 되었지만 지하실에 대피했던 사람들은 모두 생명을 건졌죠. 나에게 들이닥친 첫 번째 죽음의 위기였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외국에서였습니다.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고 살다가 경제적으로 넉넉지도 못한 형편에 뱃심 좋게 나 혼자 먼저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엔 유학생들이 많지 않을 때였습니다. 나는 생활비라도 벌어보려고 학교 기숙사 식당에서 일주일에 20시간씩 접시 닦기, 청소, 샌드위치 만들기 등을 했습니다. 몇 년 후 아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나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저녁 9시 반부터 자정까지 식당에서 일하고, 아내도 이웃의 ‘애 봐주는 사람(baby sitter)’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1982년 5월 중순경, 자정이 지나 식당 청소를 끝내고 자전거로 귀가하던 중 무서운 속도로 비탈길을 내려오던 백인 학생의 자전거가 나를 측면에서 들이받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이래서 죽는구나,  죽으면 안 되는데…”하면서 기절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내 옆엔 그 학생이 나를 보면서 염려스러운 듯이 괜찮냐고 물었죠. 나는 다시 살아난 것에 만족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나의 자전거는 그 당시 학교에 등록되지 않은 상태여서 은근히 그 일로 겁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자전거 바퀴가 크게 휘어진 것을 보면 충격이 대단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 자전거를 근처에 있는 쓰레기장에 버리고 집에 와 보니, 온몸에 피멍이 들었고 곳곳에 피가 나 있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가슴이 계속 따끔따끔하면서 아픔이 가시지 않아 학교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검사를 받으니 오른쪽 갈비가 4개나 금이 갔다고 했습니다. 하마터면 객지에서 죽을 뻔했던 두 번째 위기였습니다.

세 번째 사건은 1983년 9월 초에 일어났습니다. 수년간 고된 유학생활을 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었고 체력도 바닥이 났습니다. 1983년 여름 방학 때는 그 당시 내가 살던 곳에서 버스로 19시간이나 걸리는 뉴욕시까지 가서 교포들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이나 야채 가게에서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하루에 10시간씩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힘에 벅차 고국의 선생님께 나의 그런 상황을 알리니 선생님은 그렇게 생활하지 말고 귀국하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은 2학기가 시작되었으나 급히 오면 시간강사 자리를 마련해 보겠다고 하셨죠. 나는 비행기 표를 구입하기 위해 뉴욕으로, 시카고로 이곳저곳 여행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겨우 한 장의 표를 구해 우선 나만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 9월 1일 소련 전투기에 의해 KAL기 007편이 격추되었습니다.

그 비행기의 항로는 내가 탄 비행기의 항로와 거의 같은 것으로 나도 그 비행기를 탈 뻔했습니다. 알래스카를 거쳐 캄차카반도 동쪽을 지나 사할린 부근 상공을 날고 있을 때, 며칠 전 바로 저쪽 방향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었다면서 사람들이 웅성웅성했고, 곧 기내는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9월 3, 4일인가 내가 김포에 도착하니 나를 귀국하라고 했던 선생님 댁에서는 그 사건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곧 이어 미시간에 있는 지도교수로부터도 나의 안부를 묻는 서신이 급하게 왔습니다. 이것이 내가 맞이한 세 번째 죽음의 위기였습니다.    

이처럼 나는 세 번에 걸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 나는 어려움이 닥치면 그런 체험을 떠올리며, 죽음의 위기 때마다 나를 살려주신 분께 감사하고 내 삶의 의미를 찾곤 합니다. 내가 겪었던 그런 고비들은 나에게 바람직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그리고 조심조심 살아가라는 무언의 명령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죽음은 일상적인 나를 다시 일깨우는 각성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실존철학의 주장과 맞물려서 말입니다.

필자소개

안건훈


현 강원대 명예교수통일협회 공동대표. 고려대 철학과를 나와 서울대(교육철학)와 미시간주립대(논리학, 과학철학)에서 석사, 고려대와 미주리대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취득. 한국철학회 부회장, 한국환경철학회 회장, 한국역사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논리와 탐구』, 『기호논리학1』, 『기호논리학과 그 응용』, 『이분법적 사고방식』, 『확실성탐구』, 『인과성분석』, 『자유의지와 결정론』, 『환경문화와 생태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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