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눈물을 [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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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눈물을

2014.11.14


요사이 몇 주간 살맛이 나는 날들이었습니다. 이 시골 동네의 슈퍼마켓에 콩나물이 들어와 이젠 콩나물국이 먹고 싶을 땐 왕복 2시간이 걸리는 한국 마켓까지 가지 않아도 되고 한인교민에 관한 나쁜 기사만 접하다가 좋은 기사도 읽게 된 것입니다. 지난주 지자체 선거가 있었는데 남쪽 대도시인 토론토 시와 북쪽 소도시 오로라 시에서 두 명의 한인교포가 시의원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토론토에서 선출된 교포는 8선을 했으며 오로라 시의 교포는 유색인종 분포가 15%인 곳에서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초선으로 당선되어 더욱 자랑스럽습니다. 오로라 시는 현 거주지로 이사하기 전 내가 살던 곳이라 오로라에서 계속 거주했다면 나도 가치 있는 한 표를 던졌거나 그의 선거운동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살맛 나는 고국의 소식이 있어 즐겁습니다.
송추 계곡에 버들치가 돌아왔다는 소식입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송추하면 신촌 역에서 낡은 기차를 타고 야유회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어느 아담한 식당의 벽난로 앞에서 얘기를 나누며 딱 한 번의 데이트를 했던 사람도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들렀던 송추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습니다. 계곡까지 늘어선 좌판들과 음식점, 천막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 매우 지저분해져버린 것입니다. 거기에 물놀이를 하도록 물을 가두어 깊은 산속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탁해져 물고기도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좌판과 천막 음식점들이 없어지고 차량을 통제하여 아름다운 장소로 변했다고 합니다. 또한 물의 흐름을 막았던 물막이 콘크리트를 허물어 1급수에만 산다는 버들치도 돌아왔다고 하니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이렇게까지 변모시킨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공단은 국비 365억을 들여 음식점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좌판과 천막들을 철거하는 등 5년 동안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또 살맛이 나지 않는 얘기도 있습니다. 송추 계곡보다 더 중요한 문화유산이 망가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목조 건축물 중 국보 18호인 고려 중기의 가장 오래된 건축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름다운 배흘림기둥과 팔작지붕, 아름다운 벽 분할미를 자랑하는 영주 부석사가 그 찬연한 미를 잃어가고 있으며 그 주변은 상업성 구조물들로 20여 년 전의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찾았던 절집 중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청도 운문사, 강진 무위사, 부안 내소사, 서산 개심사, 영주 부석사입니다. 각각의 사찰들이 모두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중 배흘림기둥이 팔작지붕을 사뿐히 받치고 있는 무량수전의 단아한 기품과 고고함이 어우러진 부석사를 아주 사랑합니다. 더욱이 적요한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서 바라보면 수도 없이 겹쳐진 소백산 자락 능선들이 펼치는 장관에 살이 떨릴 지경이었습니다. 이곳의 모습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미의 운치와 진수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십여 년 전 무량수전을 보러 부석사 일주문까지 오르던 길은 지금도 그곳으로 가고 싶을 만큼 사색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소박한 원두막 길옆으로 마치 열병식을 하듯 잎을 떨어뜨린 후 대열을 맞춰 서 있는 잘 생긴 사과나무들을 바라보며 걸었던 기억은 지금도 고국을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몇 년 전 다시 찾은 영주 부석사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래전 보았던 아름다운 부석사는 시끄러운 장터 같았고 부석사 가는 길의 운치를 자아내던 사과밭은 모두 없어졌습니다. 요사채에서 무량수전 앞 안양루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썩 볼품없는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 툭 터져 시원하였던 안양루와 무량수전 앞을 답답하게 만들어 자연스러웠던 부석사의 장쾌함과 조화미가 사라졌습니다.

부석사 일주문까지 오르는 잔잔하고 한적했던 은행나무와 과수밭 길은 형형색색의 천박스런 온갖 간판이 붙은 음식점들이 즐비하여 고요한 사찰에 온 것인지 서울 어느 먹자골목에 들어선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더욱 황당하여 화가 났던 것은 일주문 바로 옆에 커다란 수영장보다도 더욱 큰 우람한 분수가 있는 연못을 만든 것입니다. 얼마나 연못이 큰지 부석사와 무량수전이 초라해 보이고 불쌍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 연못이 아닌 연못은 부석사로 향하는 길 아래 낭떠러지처럼 밑으로 푹 빠져 있고 가장자리를 시커멓고 우락부락한 매우 커다란 돌들로 들쑥날쑥 채워 전혀 호감이 가거나 아름답지 않고 우스꽝스러웠으며 무서움이 앞섰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밤엔 무슨 분수 쇼를 하거나 멋있는 조명을 비추려고 했는지 아니면 워터쇼를 하려고 설치된 것처럼 보이는 기다란 철골 구조물들로 보기 흉측했습니다. 고요함이 중요한 고색창연한 사찰 앞에 현란한 조명이 웬일일까요? 부석사 일주문 근처가 조명 워터쇼(watershow)로 유명한 미국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의 벨라지오 호텔 앞인가요? 아니면 고래쇼와 워터쇼로 유명한 샌디에이고에 있는 씨월드 놀이터인가요? 그런 곳들처럼 밤에 조명을 밝히거나 시간 맞춰 분수 쇼를 하려고 엄청난 공사비를 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무량수전과 배흘림기둥이 눈물을 흘릴 것 같았습니다.

누가 어떻게 해서 이런 공사를 했을까요? 얼마나 크나큰 실책을 저지른지 모릅니다. 오히려 많은 국고를 낭비하고도 부석사 앞을 천박하게 망쳐놓은 결과를 초래한 것은 국가와 후손들에게 크나큰 폐를 입힌 일이니까요. 누가 이런 계획을 주도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이 단 한 번이라도 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고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유홍준 교수(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영주 부석사에 대한 글을 읽었더라면 예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런 어리석은 일은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 최순우 선생은 그의 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또 조선 백자에서 우리가 느끼듯 선생께서는 한국미는 언제나 담담하고 욕심이 없어서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 솜씨가 별로 꾸밈없이 드러난 것, 다채롭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은 그다지 슬프지도 즐거울 것도 없는 덤덤한 매무새가 한국미술의 마음씨이다, 라고 말씀했는데 이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더라도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이젠 그 어디서 아름다움에 사무치던 고마움을 찾을 수 있을지.

모든 것은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만들고 꾸미고 붙여 조상이 남겨준 아름다움을 잘 보존하기는커녕 망가뜨리는 것은 하잘것없는 욕심 때문입니다. 웬일인지 우리들은 무엇이든 전통적인 것을 잘해보겠다고 만지면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결과를 종종 봅니다.

한국의 유적이나 사찰의 아름다움은 정적인 주변 환경과 그것이 꾸며주는 잔잔한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일은 거대한 것을 꾸민다거나 지나친 과장과 현란한 색상을 쓰는 장식을 절제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지형지세가, 우리 조상들이 남겨주신 유산들이 소박하고 잔잔하고 여유롭고 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 옐로스톤 국립공원 혹은 중국의 장가계라든지 스위스나 캐나다의 알프스 록키처럼 웅장한 자연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과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유산이 없고 일본의 오사카 성, 키요미즈데라(淸水寺), 중국의 자금성,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그리고 버킹엄 궁전처럼 거대한 건축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한국의 산하 곳곳 휴양지나 등산로 등은 자연재료들로 자연과 조화롭게 조성되는 곳이 많아 반갑습니다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조상이 남겨준 아름다움을 잘 보존하는 것입니다. 영주 부석사도 하루빨리 옛 모습을 되찾기를 고대합니다. 다시 분수를 메우고 음식점들을 이주시키고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밭 길을 따라 걷는 일주문을, 고적하고 순박했던 그 옛날로 돌려놓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곳은 우리의 자랑이니까요. 좀 불편하더라도 참고 원래대로 잘 보존하여 후손에 남기는 게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합니다.

필자소개

오마리

미국 패션스쿨 졸업, 미국 패션계에 디자이너로 종사.
현재 구름따라 떠돌며 구름사진 찍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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