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오영의 수필 미학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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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오영의 수필 미학

2014.10.28


얼마 전 한 문학 단체가 경북 청송 객주문학관에서 개최한 문학 여행(‘제2회 한국산문 가을 정기 세미나’)을 다녀왔습니다. ‘윤오영의 수필 미학’을 주제로 한 모임에 강사로 참여하였지요. 아래 글은 주제발표 내용 중 일부를 발췌, 보완하여 소개하는 것입니다.

수필가 윤오영(尹五榮, 1907~1976)은 피천득, 김진섭, 이양하, 김소운 등과 함께 우리 근현대 수필계에 큰 영향을 끼친 분입니다. 피천득이 전무후무한 대중친화적인 슈퍼스타였다면, 윤오영은 생전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근에 이르러 높은 평가를 받으며 재조명되고 있지요.

윤오영 수필은 탈속한 선비정신과 절차탁마한 세련된 문장이 두드러집니다. 만연체, 화려체의 난삽한 문장이 득세하던 당시 수필계에서 윤오영의 간결한 문체는 이채롭기만 합니다. 옛것에 대한 그리움, 소년시절에 대한 향수, 도교적 관조와 명상, 인물에 대한 묘사, 여성과 관능에 대한 헛헛한 경도(傾倒)가 윤오영 표 수필의 특징입니다.

윤오영 수필은 비교적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달밤’ ‘참새’ ‘조약돌’ ‘부끄러움’ ‘방망이 깎던 노인’ 등이 위 경향을 대표하는 글이지요. 대표적 중 한 편인 ‘염소’는 특이한 사례로 주제의식이 깊고 철학적이며 다방면의 인용이 조화를 이룹니다. 염소 장수와 뒤 따르는 염소 무리의 행각에서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과 비극적 숙명을 짚어내는군요.

윤오영은 수필 평론으로도 일가를 이루었어요. 의고체(擬古體)로 쓴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에서 전개한 이론은 일세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효력을 잃은, 피천득 유의 ‘누에의 입에서 액(液)이 고치를 만들듯이 그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주장과는 궤를 달리한답니다. 윤오영은 현대수필작법의 금과옥조(金科玉條)를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 옛사람이 높은 선비의 맑은 향기를 그리려 하되, 향기가 형태 없기로 난(蘭)을 그렸던 것이다. (구체적 형상화)

- 작자와 독자 사이를 잇는 사랑은 시대(時代)의 공민(共悶)이요, 사회(社會)의 공분(公憤)이요, 인생(人生)의 공명(共鳴)이다.(소재와 주제)

-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답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情)이 서리나니.(감정의 정화, 사유의 깊이)

- 사랑이 깊은 여인은 밤새도록 하소연하던 사연도 만나서는 말이 적으니.(간결한 문장)

- 물밑의 흙과 같이 그림자 밑에 더 넓은 바닥이 있어 글의 배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음미(吟味)에 음미를 거듭할 맛이 나는 것이다.(함축과 여운)

윤오영 수필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방망이 깎던 노인’과 ‘염소’를 제외하면, 실존적 자각이라든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 사회적 약자인 이웃에 대한 연민, 엄혹한 시대상황 등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주제에 대한 직간접 언급이 없다는 점이에요.

글 속에 삶에 대한 의미화나 성찰이 결여되었다거나, 사회성이나 시의성(時宜性), 역사 인식이 떨어지는 문제점은 윤오영에 한한 것은 아닙니다. 동시대 다른 수필가에게도 적용됩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양적 팽창을 거두어 수필 인구가 수천을 헤아리는 오늘날에 와서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듯합니다. 전승되고 답습되었을 뿐 아니라 강화된 측면도 있음을 간과할 수 없어요.

*‘동라(銅)와 바이올린의 G현, 횔덜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크누트 함순의 이삼 절, 날아가는 한 마리의 창로(蒼鷺), 새의 주검 위에 떨어진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해석이 뒤따르지 않는 자연 예찬, 슬픔을 강요하는 파란만장한 삶의 곡절,  신변의 그렇고 그런 일을 적은 생활 글, 나와 가족에 대한 자랑 아닌 자랑(그러니까 결국 자랑), 그저 선행(善行)일 뿐인 감동적인 이야기의 범람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일상의 작은 일을 감각적인 문체로 표현하는 자기고백적인 소위 ‘서정수필(문예수필)’로 범위를 한정하여도 지금 우리가 쓰는 글이 과연 윤오영 등 근현대 명편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윤오영 수필이 이룬 문학적 성과와 유산을 흠모하며 기리면서도 마음 한편에 돌멩이가 앉은 듯한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소이(所以)입니다.

고매한 수필가 윤오영은 우리에게 과제를 남기고 성찰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한층 분발을 촉구하는 것 같기도 하군요. ‘수필의 주제는 시나 소설의 그것과 다르단 말인가?' 뒤따르는 고전적인 질문이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문학은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림[畵]과 그림자[影]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보일 뿐인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안톤 슈낙김진섭 번역)에서 따옴

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외국어대 독어과 졸업. KAL 프랑크푸르트 지점장 역임.
한국수필(2008, 수필) 신인상 . 시와문화(2011, 문화평론)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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