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지표를 정하며 [방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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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지표를 정하며

2014.10.14


오래전부터 생활습관을 바꾸어보려고 ‘WDC’ 지표를 정해 매일 기록해 왔습니다. WDC에서 ‘W’는 걷기(walking), ‘D’는 음주(drinking), 그리고 ‘C’는 커피(coffee)를 뜻하는 각 단어의 첫 글자를 조합하여 생활습관 실행 지표를 만든 것입니다.

W지표는 평소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걷기를 소홀히 하고 있어 정한 것입니다. 걷는 횟수는 1주일에 5회 이상으로 정하고, 걷는 속도는 10분에 1Km 정도로 30분 이상 걸었을 경우 걸은 시간을 분(min)으로 기록을 합니다. 기록을 시작한 후 어느 정도 잘 지켜지고 있지만 아직 미흡하다고 판단되어 앞으로 더 확실하게 지켜질 때까지 계속 적어나가기로 했습니다.

D지표는 즐겨 마시고 있는 술을 바로 끊는다는 것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어 마시는 양을 줄여나가기로 마음먹고 정한 지표입니다. 기록은 하루 마신 음주량을 소주로 계산하여 술을 전혀 마시지 않은 날은 웃는 얼굴(^.^!!), 반주만 한 날은 흰 삼각형(△), 소주 반 병에서 한 병 이하는 검은 삼각형(▲), 그리고 소주 한 병은 별표(★)로 매일 적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소주 한 병 반을 마신 날은 ★▲와 함께 화가 난 얼굴(-.-!!)이 따라붙게 됩니다. 이렇게 적다 보니 절주(節酒)가 확실해지면서 적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적자생존’이란 말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절주도 아직 더 필요한 것으로 여겨져 D 지표도 계속 적어나가기로 했습니다.

C지표는 커피 마시는 습관에 대한 것입니다. 아침에 연구실에 나오면 의레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일을 시작하고, 일을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자주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하루에 커피를 5잔 이상 마시는 날이 잦아지고, 특히 오후 4시 이후에 커피를 마시면 밤잠에 영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마시는 커피를 3잔 이하로, 그리고 오후 4시 이후에는 마시지 않는 것으로 정하고 매일 마신 잔 수를 기록해 왔습니다. 이제 커피 마시는 것은 계획에서 정했던 이상으로 습관으로 정착되어 기록에서 빼기로 했습니다.

커피의 C를 무엇으로 바꿀까 곰곰이 생각하는데, 그 동안 이런 저런 핑계로 소홀해진 독서가 퍼뜩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커피의 C를 ‘책 읽기’를 나타내는 R(reading) 지표로 대치하기로 하고, 지표의 순서는 앞으로 생활습관으로 제일 먼저 정착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걷기(W)를 맨 뒤로 하고, 새로 시작하는 독서(R)를 맨 앞자리에 둔 ‘RDW’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평소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계획이 세워지면 즉시 실천해야 한다.'고 하던 말을 떠올리며, 바로 ‘RDW’ 지표를 실행하기 시작했습니다.

R 지표를 정하며 생각난 것은 정년을 1년 앞두고 세운 ‘2030 계획’ 중 하나인 2030년까지 500권 이상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는 한 달에 3권 이상 읽어야 한다는 답이 나왔고, 책 한 권의 분량을 평균 300쪽으로 잡아 하루 평균 30쪽 이상 읽기로 정하고 읽은 쪽수를 매일 적기 시작했습니다.

책장에서 첫 번째 읽을 책을 고르는 중에 소설가 박완서 님의 따님인 호원숙 님의 산문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는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책을 열어 서문을 보니 ‘어릴 때부터 제 머릿속에는 책이 굴러다녔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작가의 글이 마음에 와 닿으며 책읽기 지표의 첫 번째 책으로 선택했습니다.

책에서 이른 봄에 눈 덮인 산야에서 제일 먼저 꽃봉오리를 터트리는 복수초를 비롯해 매화나무, 은방울꽃, 매발톱, 노루귀 등 계절에 따라 그리고 주변 환경에 따라 변하는 다양한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얼굴이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식물학자인 나보다도 식물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연구실에서 염색체의 세포지리학적(細胞地理學的) 분포의 연구를 위해 전국적으로 채집하여 조사한 ‘무릇’이란 식물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어 흥미를 더했습니다.

연주대에 오르니 보라색 무릇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당당해 보이는 보라색 꽃대에 호랑나비가 꽃마다 차지하고 있는 풍광이 환상적이다. 자주꿩의 비름이라는... <50쪽>

책 속에 담긴 아련하게 다가오는 사연들로 마음이 편안해지며,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산문집을 읽기 시작한 지 7일째 되는 아침 첫 번째로 정한 책의 마지막 쪽인 249쪽을 넘기며, 머릿속이 맑아지고 가슴도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장은 ‘아버지의 초상’이란 주제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모처럼 내가 세 살 때인 625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납치당해 가시어 소식도 모르고,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게 해주는 대목이었습니다.

나에게는 가끔 어머니의 존재가 그동안 쓰신 작품의 양만큼 버거워질 때가 있다. 또 그냥 살아가는 것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무것도 남기신 게 없는 빈 들판 같은 아버지가 따듯하게 나를 감싸 안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시는 것 같다.

R 지표를 정하고 읽은 첫 번째 책을 덮으며,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말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책 읽는 것을 친한 친구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은 자신의 일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행복 십계명’에도 책을 많이 읽으라는 계명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책은 마음을 밝고 맑게 해주는 보물이니까요.

필자소개

방재욱

양정고. 서울대 생물교육과 졸. 한국생물과학협회, 한국유전학회, 한국약용작물학회 회장 역임. 현재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과총 대전지역연합회 부회장. 대표 저서 : 수필집 ‘나와 그 사람 이야기’, ‘생명너머 삶의 이야기’, ‘생명의 이해’ 등. bangjw@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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