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서 착한 사람들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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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서 착한 사람들

2014.09.26


“아예 굽갈이를 하면 얼마나 들까요?”

“만 오천 원은 내야 해요.”

“알았습니다, 갈아 주세요.”

“만 삼천 원만 주쇼.”

구두 수선 아저씨가 눈치 못 채게 고개를 돌리고 웃었습니다. 그깟 이천원이 양심에 걸려서 금방 말을 바꾼 걸 들키게 되면 무안할까봐서요.  

새로 산 구두의 굽 거죽이 자꾸 벗겨져서 몇 번 풀칠을 해 달라고 하다가 아예 재질이 다른 굽으로 고쳐 달아야겠다고 마음 먹고 물었던 것입니다. 구둣방 아저씨는 제가 값을 깎으려니 예상하고 만 오천 원을 불렀던가 봅니다. 그런데 부르는 대로 순순히 다 줄 기세이자 그만 양심에 ‘찔려’ 제 값을 부르게 된 모양입니다. 바가지를 씌운 댔자 고작 이천원인데 말입니다.  

같은 날 이번에는 옷 수선집엘 갔습니다. 치마 허리를 줄여달라고 하니 같은 색 실이 없다는 좀 엉뚱한 핑계를 대며 안 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빙글빙글 눈이 돌아가도록 수없이 많은 동글동글한 실패에, 돌돌 말린 실들이 저리도 많은데 그깟 겨자색 실이 설마 없을까, ‘난감한 의심’이 들었지만 없다는 데야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비슷한 색으로, 적당히 노란색으로  해 주세요.”

“그러면 지저분해 보여서 안 돼요, 원래 실 색과 연결이 안 되잖아요.”

“무슨 앙드레 김 옷도 아니고 대충 해 주시면 돼요. 색이 안 맞아도 뭐라 안 할게요.”  

옷을 새로 만들어 내라는 것도 아니고 허리 줄이는 것쯤이야 옷 수선집 ‘본연’의 업무가 아닌가 말입니다.

미궁을 빠져나올 ‘아리아드네의 실’에 ‘실낱’ 같은 희망을 품듯, ‘실랑이’를 계속하는데 가만 생각하니 ‘아마도 일에 비해 품이 많이 드는가 보다’ 하는 쪽으로 ‘심증’이 굳어졌습니다.

“일이 어렵고 귀찮은 편에 속하나요?” 하고 단도직입으로 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허리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옆 단을 다 손 봐야 해서 만 오천 원은 줘야 한다며 머뭇대며 말하는 겁니다.

그 날은 아마도 제겐 ‘만 오 천원의 날’이었나 봅니다. 알았다고 하는데 구둣방 아저씨처럼 그 자리에서 말을 바로 바꿉니다. 만 삼 천원만 달라고. 두 사람이서 짰나 봅니다.
그냥 만 오천 원을 주겠다고 하자 만 삼천 원이면 된다고 또 ‘실랑이’가 벌어질 뻔했습니다.

며칠 후 옷을 찾으며 만 오 천원을 내자 기어코 이천원을 돌려 줍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많이 불렀나 봅니다. 그냥 됐다고 하니 얼결에 “물 좀 드릴까요?” 이러는 겁니다. 아줌마가 미안하고 당황해서 그만 아무 말이나 입에서 나오는대로 했던가 봅니다.

이천원일 뿐입니다. 적은 돈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돈은 많고 적은 것으로 구분하는 게 아니라 값어치나 가치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살면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의 값어치(price)가 가치(value)와 동일할 수는 없다는 것도 배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값어치, 즉 ‘적정 가격’은 너무나 잘 알지만 정작 그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둣방 아저씨와 옷 수선 아줌마는 제게 적정 가격을 제시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저 역시 이천원이 ‘아무렇지 않지 않은 돈’은 아니니까요. 간짜장이 먹고 싶은데 짜장면을 먹어야 할 때가 그렇습니다^^.

게다가 ‘바가지 썼다’고 생각하면 이백원도 억울한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날 저를 붙잡았던 생각은 우리 세 사람은 얼마나 ‘착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둣방 아저씨는 오른쪽 검지 두 마디가 없고, 수선집 아줌마는 너무나 뚱뚱해서 자기 몸 하나 돌리는 데도 비지땀을 흘립니다. 그런데다 가게는 속된 말로 ‘콧구멍’만 합니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낙타 만한 몸뚱이로 바늘 구멍과 온종일 씨름을 하는 겁니다.  

남의 인생을 멋대로 예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 분들의 지나온 생은 편하고 좋았을 때보다는 신산스러운 고비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착합니까. 돈 이천원에 고운 심성이 불편해지고 양심에 저려 고뇌하는 영혼이라니.  

저는 또 저대로, 할려고 든다면 팔자 타령 좀 하게 생긴 처지이지만 아직은 그런대로 마음에 여유가 있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너무 착해서 탈입니다. 자기가 너무 착하다는 것조차 모르고 착해서, 어떤 땐 속이 상하고 가슴이 뻐근하게 아플 때도 있습니다. 가난해서 착한 건지, 착해서 가난한 건지 사람을 헷갈리게 하면서 말입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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