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링 부조리' ① 강요되는 계약서 요원한 해외진출

 

 

source icdb.ca

 

 

강요되는 계약서, 요원한 해외진출
현대판 소작농 엔지니어링사…"甲이 원하면 모두다, 책임은 乙이 짊어져"
이의 제기는커녕 무보수로 A/S 수행사례 비일비재
표준계약 미명하에 甲의 일방적 주장 비판없이 받아들여야
 
乙-소작농"은 본 계약에 따라 "甲-지주"에게 해당 계약사항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1. 쌀 100섬을 수확할시 80섬은 甲, 20섬은 乙이 가져간다. 단 수확량이 100섬 미만일 경우 乙의 몫은 10섬으로 한정한다.

2. 甲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乙은 甲이 원하는 추가 부역을 수행해야 하며 乙은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3. 나라님이 농지에 대해 조세를 부과할 경우 乙이 이를 납부하고, 인상분도 乙이 책임진다.

4. 乙은 甲의 집을 조석으로 방문해 소작상황을 보고해야 한다.

5. 乙이 위 조항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경우 甲은 乙의 소작권을 강제로 회수할 수 있다.

만약 이 계약에 대해 乙이 상급기관에 부당함을 호소할 경우 甲은 乙을 멍석말이 후 타지로 내치거나 甲의 사노(私奴)로 편입시킬 수 있다.

6. 이하 예기치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甲의 결정을 우선으로 한다.

 

 

 

소작농 덕삼이는 최진사 마름이 내민 계약서에 지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강요된 계약이지만, 1년전 면천(免賤)된 입장에서 소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갑을 관계를 풍자한 유머의 한 대목이다. 다소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乙의 서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엔지니어링업계 또한 발주청이라는 슈퍼갑 아래 강요된 계약을 수행한다는 측면에서 소작농과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강요된 계약, 갑-무한권리↔을 무한책임

엔지니어링업계가 정부와 건설사로부터 부당한 계약을 강요당한 것은 오래된 관행이다.

 

건설사와 맺는 턴키계약은 모든 조항에 걸쳐 엔지니어링사의 책임을 명시하는 형태. 우선 계약서를 작성하는 주체가 건설사로 엔지니어링사는 한줄도 첨언할 수 없는 구조다.

 

계약문구도 "갑의 청구가 있는 즉시 배상하여야 한다", "을은 책임없음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을은 어떡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을은 전담반을 구성하고, 갑이 감독할 수 있도록" 등 갑의 입장에서만 기술되어 있다.

 

즉 "건설사가 엔지니어링사에 설계를 맡기는 입장이니까 시키는 대로하고 모든 책임은 너네가 져라"라는게 계약서의 요점이다.

 

E사 관계자는 "계약이라는 것이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작성해야 하는 것인데, 한국은 건설사의 일방적 언어로만 채워져 있다"면서 "엔지니어링사는 부당한 조항에 대해 입도 뻥끗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설계료 지급방식도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턴키설계료의 경우 턴키주관사가 100% 일괄지급하던 방식었지만, 건설사의 일방적 요구로 수년전부터 컨소시엄 지분률대로 계약하게 된 것.

 

일례로 대형사(50%)+중견사(35%)+지역중견사(15%)로 턴키컨소시엄이 구성될 경우 지역중견, 중견사에게는 설계료를 제때 받을 수 없고, 턴키수주가 실패할 경우 떼일 공산이 크다.

 

H엔지니어링 관계자는 "건설사의 로비전과 가격전으로 인해, 실시설계일괄입찰 즉 설계가 주가되는 입찰제도인 턴키에서 엔지니어링사가 홀대를 받고 있다"면서 "턴키초기에 비해 설계대가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 분리계약으로 인해 엔지니어링사는 또 다른 리스크를 떠안고 있다"고 했다.

 

"우리 사이에 돈 받고 일하나"…암묵적 A/S판치는 정부계약

민간계약이 뚜렷한 갑을 관계를 명시하고 있다면, 정부계약은 시계가 불분명한 안개계약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부당지시로 꼽히는 추가업무 즉 A/S에 대해 계약서는 "대가를 지급할 수 있다", "추가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 등의 조항이 대부분 삽입되어 있다. 하지만 A/S에 대해 대가를 제대로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게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엔지니어링사의 설계 귀책사유일 경우 A/S수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 그러나 법제도 및 개발계획 변경 등의 불가피한 상황까지도 엔지니어링사는 무대가로 추가업무를 하고 있다.

 

특히 시공과 다르게 물가변동으로 인한 계약금액의 증액을 인정하지 않는 엔지니어링의 경우 개발계획 변경으로 인해 설계가 중단 및 보류되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

 

D엔지니어링 관계자는 "12개월내 마무리되는 일반설계와 다르게 도시계획은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며 5년이든 10년이든 설계기간이 늘어진다.

 

물가는 계속오르는데 대가는 계약당시에 묶여 있다"면서 "도시계획 주력업체인 동호의 파산 이유중에 하나가 에스컬레이션을 인정하지 않고, 설계대가를 제때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업계는 A/S로 인한 업무부담이 총업무의 5~20%에 달한다고 입을 모은다. N엔지니어링 관계자는 "대한민국 엔지니어링계약은 사실상 이심전심으로 계약서 따로 실제업무 따로"라며 "채산성 악화는 논외로 하더라도, 줄기차게 글로벌을 외치는 국토부가 글로벌 기준과는 다른 행태를 보이는 것은 문제로, 과연 외국 컨설팅사에 대해서도 추가업무를 맘대로 시킬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고 지적했다.

 

글로벌과 역행하는 계약관행 개선없이 해외진출 요원

계약에 대해 국제적인 정의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FIDIC Red Book에서는 시공자와 발주자간의 계약을 Contract로, 컨설턴트와 발주자간은 Agreement로 명시하고 있다. Contract의 Con은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이고 Agreement 또한 합의-동의라는 뜻. 즉 국제사회에서 계약은 갑이 을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함께 동의하는 일련의 절차로 이해되고 있다.

 

K엔지니어링 관계자는 "한국의 엔지니어링 계약은 집대출 계약과 같이 울며겨자먹기로 발주자가 원하는데로 작성되고 있지만, 해외계약은 업무범위에 대해 조항조항을 따져가며 발주자와 컨설턴트가 함께 만든다"면서 "때문에 계약서 작성에 한달 이상이 소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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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사업에서 적자사업이 늘어가는 것 또한 한국엔지니어링사가 강요된 계약에만 길들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즉 워낙 을의 위치에서만 계약을 하다보니 계약서 작성능력 자체가 선진엔지니어링사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는 것.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 곽영훈 교수는 "발주자와 컨설턴트 그리고 사업이 매번 바뀌는데 표준계약서라는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며 "글로벌스탠다드라는 것은 계약을 표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의와 협의를 통해 계약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일련의 절차다"라고 했다.

 

그는 또 "한국이 해외시장 진출을 소망한다면 그들의 기준에 맞춰 계약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사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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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희 기자 | news@eng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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