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학벌만 있고 학파가 없다 [이성낙]

 

www.freecolumn.co.kr

우리에겐 학벌만 있고 학파가 없다

2014.08.01


독일 대학에서 겪은 에피소드입니다. 필자가 독일에서 처음 입학한 대학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입니다. 장구한 역사만큼 고풍스럽고 아름답기로 으뜸가는 옛 도시에 있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여름 학기가 시작되자 독일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 몰려오는 관광객이 대학 도시의 정취를 망가뜨렸습니다. ‘붕 떠 있는’ 분위기가 처음에는 활력을 주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만, 시간이 지나자 왠지 싱숭생숭해져 차분한 대학 정서와는 거리가 생겼습니다.

마침 지도교수님과 대화를 하던 중 지나가는 이야기로 관광 도시 분위기가 학업에 방해를 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 필자 의견에 동감하며 조용한 다른 대학교로 옮기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입학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전학을 한다는 게 왠지 ‘부도덕’한 행동인 것만 같아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러면서도 내심 학생 마음대로 대학교를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이 생소하기만 했습니다.

며칠 후, 필자를 만난 외국 학생 담당자가 어느 대학교를 염두에 두고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입학시켜준 대학을 의리도 없이 떠난다는 게 부담스러워 우물쭈물하는 필자를 보고 담당자가 말했습니다. “대학을 옮기는 것은 학생에게 주어진 큰 권리이며, 이는 독일 대학이 추구하는 학문의 자유(Akademische Freiheit)에 기초한 것이니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말하세요.”

그래서 필자는 먼저 얘기를 꺼낸 책임도 있어 하이델베르크보다는 조용한 대학이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담당자는 남쪽 지방에 있는 튀빙겐 대학과 북쪽 지방에 있는 마르부르크 대학을 추천해주었습니다. 필자는 마르부르크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6~1546)가 세운 첫 대학교라는 말에 대학 도시(Universitaet Stadt) 마르부르크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당시엔 ‘학문의 자유’라는 개념도 별로 와 닿지 않던 때라 학생 마음대로 대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을 하면서 차츰차츰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객관성보다는 주관적 이론이 본질인 철학이나 인문학을 전공하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학문의 자유’가 대학 교육철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실감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교수가 펼치는 이론에 따라 학생들이 철새처럼 대학교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것입니다. 그중엔 ‘영구 추종자’가 되어 스승의 학문을 계속 연구하는 학생도 많습니다. 그렇게 영역을 더욱 넓혀가니 이른바 ‘학파’가 자연스레 형성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전문의 수련 과정을 밟을 때 겪은 일입니다. 한 학회에 참석한 필자가 토론 시간에 질문을 하려고 마이크 앞에 서자, 사회자가 어느 교수 밑에 있는지 밝히라는 것이었습니다. 필자가 스승의 성함을 밝히자 사회자가 말했습니다. “아, 그럼 나제만(Nasemann) 학파이니 토론 대상인 질병에는 00계통 약을 적용하지 않겠군요.” 정확한 지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의학계에서도 학파에 따른 치료 지침이 따로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학파 중심의 독일 대학교에는 입학식은 있어도 아예 졸업식이란 행사가 없습니다. 특히 전공 분야에서 어느 대학교 ‘출신’이란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어느 교수의 문하생인지만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조선시대에도 여러 학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학파는 곧 당시 권력 구조와 밀착해 정쟁을 일삼곤 했습니다. 사색당파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와 같은 전통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학벌주의까지 덧붙어 오늘날에 이어졌습니다. 즉 끼리끼리의 ‘학벌 맹종주의’로 변질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학연·지연·학벌’이 의리라는 모호한 개념 아래 더욱 증폭되어 비논리적이고 반사회적 병폐로 우리 사회를 수렁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대형 부정부패의 악폐도 많은 경우 ‘학벌 맹종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이를 극복할 지혜를 모색해야 합니다. 아울러 이는 아마도 우리 사회에 걸맞은 ‘학문의 자유’ 개념을 개발정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옳을 것입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사평론가,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