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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삽
2014.07.11
며칠 전 삽질을 하던 중 13년 동안 써오던 삽날이 마침내 쪼개졌습니다. 언젠가부터 삽 가운데가 옆으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작년에는 더욱 깊게 파였지만 버리지를 못했습니다.어떤 삽은 크기와 무게 때문에 영 내 손과 몸에 맞질 않고 힘들었는데 우연히 샀던 이 삽만큼 편한 것이 없었습니다. 마치 내 수족처럼 부리던 것을 버리려니 웬일인지 허무하고 쓸쓸하여 올해도 계속 그 삽으로 정원 일을 했던 것입니다. 금년에는 뜻하지 않게 성치 않게 된 왼쪽 다리 때문에 정원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른쪽 다리로 삽질을 해왔는데 결국 이 삽이 완전히 갈라져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슴에 휭 하고 바람이 불어 사진을 찍어두기로 했습니다.
이 쪼개져버린 삽으로 몇 십만 삽질을 했는지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원이 없던 덩그런 집으로 세 번의 이사와 세 번의 정원 디자인을 하고 내 손으로 꽃나무와 화초들을 심었습니다. 그러니 이 삽은 나의 캐나다 생활의 표상과 같습니다. 정원 일을 함으로써 유일하게 정신적 위안을 받았으니 상당한 의미가 있지요. 캐나다 이주 후 일 년 만에 암에 걸려 수술과 치료 후유증으로 생긴 손가락 장애를 이겨내는 동안 깊어진 우울증을 조금씩 걷어 내게 된 것은 정원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항암 치료의 후유증으로 일상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사했던 가정사로 우울증이 한층 심하여질 때 꽃들과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정원은 나의 유일한 안식처, 힐링 장소였습니다. 유년기와 평창동 집 지은 후 꽃모종 삽이나 만졌던 내가 경험이 전혀 없는 삽질도 어려웠고 흙 한 포대를 들 수 없어 낑낑대야 했던 정원 일은 막노동이라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처럼 키우고 정성을 다하면 피어나는 꽃들이 가족이나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을 보상해주었으니 내 몸에 꼭 맞는 삽이 더더욱 고마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열 손가락이 모두 아파 면장갑을 낀 그 위에 커다란 고무장갑을 덧끼고 그렇게 13년 동안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매해 이 삽과 더불어 정원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정원 일도 고달파서 작년 같지 않습니다. 서너 시간 정원 일을 하고 나면 그 다음 날까지 끙끙 앓는 것이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쩌면 나와 함께 고락을 같이해왔던 이 삽도 내 몸을 알고 ‘주인이여 이제 고만 쉬시오’ 라는 뜻으로 깨졌는지도 모릅니다. 곧 정원과의 작별을 할 때가 다가오기에 삽이 미리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제 내가 정원에 대해선 상당히 전문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꽃들과 나무들의 생태, 토질과 물 그리고 정원 디자인(landscape design)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생겼으니까요. 내 전공 용어와 영어 단어는 많이 잊어버렸지만 오히려 꽃들의 이름과 정원일 용어들은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하긴 13년간 정원에 매달려 살았으면 그 또한 정원 전문가라고도 할 만하지 않나, 좀 더 내가 젊었더라면 차라리 정원 디자인 직업인으로 나설 수도 있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얼마 전 이제 만으로 33세가 된 막내아들을 만났습니다. 미국 국적과 캐나다 국적을 가진 막내아들이 마땅한 직장도 없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고 있는 모습이 어미로서는 정말 딱하고 속이 상하여 제안을 하려고 만났던 것입니다. 어려서 미국에 홀로 떼어놓을 수가 없어 캐나다로 데려와 같이 거주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데려다 놓았더니 미군에 들어가 복무를 하자마자 캐나다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장가를 갈 나이도 되었는데 일정한 직장이 없이 지금까지 캐나다 이주 후 20년을 떠돌고 있습니다. 잠깐 잠깐 다니던 직장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언제나 시니컬하고 불만투성이인 아들이 걱정이었습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며, 내 마음에 드는 직장,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직장, 인내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거기다 전문적인 것은 공부한 게 없으니 직장 잡기가 결코 쉽지 않지요. 내 지인들의 아이들은 모두 문제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지라 나는 지인들이 부럽기가 그지없지만 이 또한 내 운명이라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막내아들에게 제안을 했던 것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꼭 학문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학비를 다시 대줄 테니 기술학교를 가서 현재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40이 되었을 때를 대비할 수 있지 않느냐라는 내 말이 막내아들에게는 영 먹히지가 않았습니다. 앞으로 7년 세월 어영부영 지내다보면 40이 금방 될 테고 40이 넘으면 직장 잡기도 더욱 어려워질 텐데 막내아들은 무슨 자신이 넘쳐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세상에 대한 무서움이 없어 보입니다. 놀기를 좋아하고 부모나 타인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는 고집이 형과 동생이 어쩌면 그렇게 똑같아서 가는 길도 그렇게 비슷하게 가는지, 큰 아들처럼 40이 되어서도 밥 걱정하고 살까봐 막내만큼은 30대 초반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깨달아 주었으면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내아들과 말싸움만 하다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눈물이 났습니다.나는 아이들에게 명문대학을 가라든지,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를 하라고 윽박지르거나 강요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저렇게 태평한 생각으로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세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 소시민으로 살더라도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하며 살라는 내 교육 방법이 이 시대와 맞지 않았는지 자문해봅니다. 다른 극성스러운 엄마들처럼 명문학교를 보내기 위해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아이들과 싸우는 일은 나 자신부터 힘들어 할 수도 없었으니 아이들이 저렇게 된 것도 내 책임인가 싶어 요즘은 시름이 깊어집니다. 이젠 오직 네 밥벌이는 해야 한다, 결혼을 한다면 네 자식의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는 아빠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 법을 어기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 종류의 직장도 가릴 필요 없고 어떤 일이라도 수치스러워 할 필요 없으니 한 곳에서 오래 경험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식당의 주방장이 되는 것도 주방에서 허드렛일부터 10년 이상 중노동을 참고 견뎌야 주방장이 되는 것이고 그 어떤 직업 세계에서도 10년 이상 같은 일을 하지 않고서는 전문가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요즘의 젊은이들은 우리 시대와 달리 이기적이지만 영민하여서 젤라또 아이스크림 가게나 빵 가게를 개업하려고 해도 해외 유학을 가서 전문성을 키웁니다. 세상이 예전과 달라 평범한 생각으로 도전했다가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막내아들은 내가 헤아리지 못하는 숨겨진 꿈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살기가 어려워진 무서운 시대입니다. 삶의 의미가 모두 물질적인 것으로 집중되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물질적인 것이 아니면 대화나 정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정신적으로 여유롭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제 한여름 밤의 꿈과 같습니다. 이곳 캐나다도 노인층과 이민자들의 빈곤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고 세계 경제대국이라는 미국도 빈곤층이 급증하여 영양실조된 아이들, 집이 없어 부모와 자동차에서 생활하며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치과 치료를 받지 못해 이를 잃고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치아의 염증이 머리로 퍼져 죽은 아이도 있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복잡하고 스피디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한 우물을 10여 년은 파야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진리입니다. 흙을 파다가 완전히 깨어져버린 정든 삽과 작별을 하며 새삼 다시 한 번 느낀 이 깨달음을 5분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막내아들에게 전해줄 길은 없을까요. 무슨 말이든 들으려 하지 않는 막내아들과는 이렇게 용도폐기 처분 상태인 삽에 대한 대화조차도 나눌 수 없어 서운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 더 이상 태평하게 지낼 시간이 없음을 어서 깨닫고 한 우물을 파면서 전문성을 키우려 노력만 해준다면 내 서운함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결단과 결정은 아들의 몫입니다. 그저 훗날 깨어진 삽의 사진이나 아들에게 보낼까 합니다.
필자소개
오마리
미국 패션스쿨 졸업, 미국 패션계에 디자이너로 종사.현재 구름따라 떠돌며 구름사진 찍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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