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4.19혁명 발생할 것"

4.19혁명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저항해 시민들이 저항권을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끝낸 민주주의 시민 혁명. 국제적으로는 아시아에서 드물게 성공한 민주 혁명으로 평가된다.

2.28 학생민주의거와 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4.19 혁명의 서막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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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부정선거. 이 사건으로 인해 3.15 의거와 4.19 혁명이 발발했다.

직전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장면이 이겼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된다면 이승만이 사망할 시 대통령직이 민주당 소속 부통령에게 승계된다는 것을 우려한 자유당에 의해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다만 이 선거가 국회에 의해 법적으로 무효 처리되지는 않았으며 두 당선자 모두 임기 개시일 이전에 사퇴하거나 사망하여 사실상 무효화되었다.[2] 선관위 선거통계시스템에서도 '4대 대선'의 개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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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 이강학 한희석 사형 선고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 만 사형집행

 

 
맨 우측이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 dict.kdemo.or.kr

 

1960년 12월 30일,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인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이 공포되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가 설치되었다. 1961년 2월 11일 오후, 특별검찰부는 3.15부정선거 원흉인 최인규 한희석 이성우 이강학 최병환 등 5명을 특별재판소에 기소하였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1961년 6월 21일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 조직법」이 공포되자 3.15부정선거 관련 사건들이 5.16군사재판소로 이관되었다. 7월 29일, 첫 군사재판이 시작되었다. 최인규 등 67명에 대한 심리를 개시하여, 9월 8일 최인규 이강학에 사형, 이성우 최병환에게 징역 10년을 각각 구형했다.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 사형 집행

 

9월 20일, 판결공판에서 최인규 이강학 한희석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12월 6일 항소심에서 최인규, 한희석(자유당기획위원장)에게 사형이 확정되어, 1961년 12월 21일 서울형무소(서대문교도소)에서 최인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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