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힘’과 외교, 그리고 외교관 [정달호]


‘음악의 힘’과 외교, 그리고 외교관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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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힘’과 외교, 그리고 외교관

2018.11.26

‘음악의 힘’이라니. 그게 무엇이다, 라고 제가 말한다면 어느 누가 고개를 끄덕일까요? 한참 생각하다가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음악, 그 자체가 삶이고 사랑이며 문화요 예술이기 때문이죠. 거기서 힘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오감의 하나로서 귀 또는 둘 해서 귀와 눈을 동원하여 듣고, 보는 것이 음악인데 누구나 그걸 접하는 순간 그 힘에 복속되고 맙니다. 무릇 예술이 그렇겠지만 귀를 통해 쉽게 다가오는 음악은 한마디로 ‘놀라움’이죠. '어메이징-Amazing!' 이 한마디면 족하지 않을까 싶군요. 그런데 그 음악에다가 웬 ‘외교’가 따라붙느냐고요? 그건 천천히 말해보고자 합니다.

음악과 가장 어울리는 계절을 꼽으라면 독자님들은 뭐라 하시겠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 . .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 안에 이 모든 계절이 들어 있고 비발디는 제목부터 4계이니 음악과 각각의 계절을 딱히 연계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런데 제가 처한 상황에서는 가을이 가장 음악을 잘 누리게 해주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특히 11월 늦가을에 음악회에 초청되거나 스스로 찾아간 콘서트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제주에 살면서 서울에서 벌어지는 음악 행사를 대체적으로라도 챙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신문이나 티브이에서 음악 이벤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냈다 하더라도 한두 개 찾아가는 데도 지리적인, 물리적인 불리함이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에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올 11월에는 정말 운이 좋아서 다섯 번이나 장안 여기저기서 또 제주에서 벌어지는 콘서트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국제음악제 오프닝 콘서트(11. 2. 롯데콘서트홀), 동 상하이 앙상블 연주( 11. 6. 예술의전당, ), 슬로바키아 국립관현악단 연주(11. 10. 서귀포 예술의전당), 한국성악동호인협회 갈라 콘서트(11. 20. 용산아트홀), KBS 심포니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11. 21. 예술의전당) 등이 그것입니다. (11월 15일 영국대사관저에서 열린 이안 보스트리지 음악 토크쇼까지 굳이 친다면 여섯 번이죠.)  이렇게 음악과 더불어 풍요를 누려본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저는 주로 집에서 티브이나 오디오를 통해 음악감상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편인데 이달, 11월에는 라이브 음악이 저를 방에서 끌어내 콘서트홀로 보낸 것이죠.

제 이야기는 그렇고 이제 ‘음악을 말하는 데 웬 외교냐?’에 대해 몇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솔직히 이번이 열 번째인 서울국제음악제(Seoul International Music Festival)에는 이사장이자 조직위원장인 임성준 전 주 캐나다 대사의 초청에 응해 간 것인데 여기서는 음악과 외교가 뒤섞인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우선 한일 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발표 20주년을 맞는 해라서 주한 일본대사관이 후원을 한 관계로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필하모니오케스트라(Japan Philharmonie Orchestra)'의 연주가 주 무대를 이루었지요. 이에 따라 주한 일 외교관들을 비롯한 일본인들이 많이 참석하였으며 콘서트 직후 일본대사관이 주최하는 갈라 리셉션 자리에서 이런저런 외교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문화외교의 창을 통해 정무적 외교가 피어나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러니 이를 또한 ‘음악의 힘’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석한 사람들에게서, 음악을 통해 형성된 양국 간의 우의가 원활한 외교관계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감지되기도 했습니다. 

은퇴한 외교관이 외교 사안에 참여하는 것 외에도 음악 분야의 국제행사를 주관함으로써 현역 때 못지않게 여전히 외교활동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 우리 외교 가족의 일원으로서 흐뭇함과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례는 하나뿐이 아닙니다. 널리 알려진 대관령음악제도 김성환 전 외교부 장관이 이사장을 맡고 구삼열 전 외교부 문화대사가 기획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대관령음악제는 평창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회가 주를 이루지만 겨울에도 작지 않은 규모로 서울 등지에서 열려 음악애호가들을 심심치 않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 음악제에서도 음악 연주를 둘러싸고 외교관들의 활동이 없을 수 없겠지요. 각국에서 저명 음악인이나 유명 연주단체가 오는 것 자체가 음악을 통한 문화외교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내년에는 한.폴란드 수교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 폴란드 공동으로 크고 작은 음악회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88서울올림픽 주제음악을 작곡한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가 폴란드 작곡가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폴란드 음악행사를 통해 무엇보다 쇼팽이 불러일으킬 감성과 정서에 많은 이가 도취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서귀포에서 열린 크지 않은 음악회(850석)도 슬로바키아 국립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통해 한국, 특히 제주와 슬로바키아 국민 간의 우의를 깊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분들이 슬로바키아가 유럽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지도 못할 터인데 이들이 직접 와서 훌륭한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그 나라, 그 사람들과 제주 사람들이 더 친숙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연주 중 박수를 너무 많이 치는 바람에 지휘자나 연주자들이 적이 당황하였던 점이 옥에 티라면 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가나 지방정부 또는 문화단체도 아닌 개인이 음악을 통해 양국 간 우호와 교류를 넓혀가는 사례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의 유수한 오케스트라나 오페라단에서 우리 음악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음으로써 우리나라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한 개인이 일과성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음악 외교를 오래전부터 해 오고 있는 특별한 사례에 관한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성악 공부를 하다가 중도에서 그만두고 한-유럽 간 음악교류에 전념하고 있는 지휘자 임재식 씨는 오래전에 ‘스페인 밀레니엄합창단’을 창단하여 한국 음악을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에 알리고 또한 스페인 음악을 한국에 알리는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스페인 가수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이들로 하여금 능숙한 한국어로 우리 민요와 가곡을 부르게 합니다. 연전에 세종회관 콘서트홀에서 이 합창단의 아리랑 연주를 듣고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임재식 씨는 애국자라는 단순한 규정을 넘어 음악을 통한 휴머니즘과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이든 공인이든 음악을 통해 세계인의 우의를 다지는 일이야말로 높은 차원의 외교라 할 수 있습니다. 변덕이 심한 주변국이나 동족 간 문제에 일희일비하는 중에도 자연스러운 문화교류의 흐름을 타고 예술을 통한 인간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결코 가벼이 볼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전직 외교관들이 은퇴 후에도 국제적인 음악제에 관여함으로써 보이지 않게 국격을 높이는 한편 음악이란 수단을 통해 세계시민들이 서로 이해하고 친숙해질 수 있도록 교류의 장을 만들고 있음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분들의 노력에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고자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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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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