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이 ‘광장’ 입구가 되어야 한다 [신현덕]


판문점이 ‘광장’ 입구가 되어야 한다 [신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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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이 ‘광장’ 입구가 되어야 한

2018.11.07

지난달 비교적 조용하게 지나간 전 북한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 씨의 무죄 판결에 찢어지듯 가슴이 아립니다. 그가 탈출할 때 북한군이 규정을 위반하고 총질을 해댄 판문점, 경비병들이 곧 비무장으로 근무를 한답니다. 최근 있었던 제주 지역 학생들의 공부 모임인 ‘휴먼 르네상스 아카데미’(HRA)에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함께 읽고 토론하며 주고받았던 이야기들로 머릿속이 혼란스럽습니다.

196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수근 씨의 판문점 탈출 사건이 위장이었다고 발표되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것이, 국가가 무슨 목적이었는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정상적인 수사를 거치지 않고 무고한 우리 국민을 희생시킨 사건이랍니다. 우리 법원은, 그가 사형당한 지 49년 만에 이루어진 재심에서, 그에게 씌워진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무죄라고 선고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결행한 한국행이 ‘진정한 탈출’이었으며, 대한민국 국민이었다고 법원이, 아니 국가가 확인한 것이지요.

보도에 따르면, 그가 가짜 여권을 이용해 몰래 출국한 것은 맞습니다. 또 부정하게 외화도 거래·사용했고요. 그의 말입니다. “남한이 북쪽보다야 백 번 낫지요.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북한이 바로 지옥이지요. 그래서 탈출했는데 남쪽도 틀렸어요. 자유도 없고, 독재고 해서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어요.”

자유 없는 북쪽이 싫어서 탈출했는데 남쪽에서도 자유롭게 살지 못했나 봅니다. 매일 감시당했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가서는 북한과 연락하지 않았느냐면서 추궁당하고 얻어맞았고, 심지어는 수사관들이 그의 발을 향해 권총을 쏘는 등 자주 위협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수근 씨가 1969년 1월 국내로 압송되자 언론들은 탈출 때의 자기들 보도는 외면한 채 죽일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그가 1967년 3월 판문점에서 탈출했을 때와 너무 다릅니다.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아버지가 월북한 북한 고위직 인사라는 이유로, 서울에서 경찰서에 불려 가 얻어맞았고, 고문당했고, 갖은 폭언도 들었습니다. 그는 생각의 자유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남한이 싫어 북으로 밀항했습니다. 그 뒤 북한군에 떠밀려 6・25 전쟁터로 내몰렸고, 사랑하는 사람과 뱃속의 아이까지도 잃었고,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남과 북의 체제(밀실)에 진저리를 쳤습니다. 정전협정에 따라 포로교환을 할 때 중립국이라는, 자유로운 ‘광장’(인도)으로 가서 인간답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광장은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고는 영원한 자유 광장인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작가 최인훈이 이수근 씨의 이야기를 미리 내다보고 소설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어쩌면 그의 이야기와 그리 닮았는지요. 최 작가는 전쟁이 끝난 지 7년 뒤에 이 소설을 썼고, 이씨는 소설이 나온 지 7년 만에 목숨을 걸고 밀실에서 자유의 광장을 찾아 탈출했습니다. 이씨는 밀실을 영원히 떠난 지 49년 만에 진정한 광장을 얻었습니다.

지난여름 무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 판문점을 견학했습니다. 공동경비대 건물 한쪽 벽 모니터에서 지난해 귀순한 병사의 탈출 경로가 시간대별로 재생됐습니다. 열화상 카메라로 찍은 영상에 남쪽을 향해 총을 쏘는, 우리 지역을 침범한 북한군이 보입니다. 귀순한 25살 북한 병사는 작은 ‘몸뚱아리’ 다섯 곳에 총알을 맞아, 온갖 장기가 훼손된 채 망가진 몸으로 ‘자유의 광장’을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씁쓸하게도, 광장에 이르는 통로를 지키다 북한군의 도끼에 찍혀 숨진 25살 미군 중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때도 비무장으로 근무하길 굳게 약속을 했었는데….

최근 남북관계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만큼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합작해 밀실을 깨버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엄청 많은 이들이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판문점과 다른 곳을 통과해 자유의 광장으로 나오겠지요. 그때는 더 이상 국민을 속이는 광장의 통로가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영원한 자유의 광장 입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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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현덕

서울대학교, 서독 Georg-August-Universitaet,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몽골 국립아카데미에서 수업. 몽골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 방어. 국민일보 국제문제대기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교수, 경인방송 사장 역임. 현재는 국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독은 독일보다 더 크다, 아내를 빌려 주는 나라, 몽골 풍속기, 몽골, 가장 간편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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