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그리기 [안진의]


여행과 그리기 [안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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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그리기

2018.10.26

평소 가깝게 지내던 정여울 작가가 제게 ‘여행’을 소재로 하는 강의 요청 전화를 주었습니다. 정 작가는 <내성적인 여행자>라는 신간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아름다운 문체로 내면을 탐구하며 여행과 글쓰기’의 문화를 넓히고 있는 작가입니다. 정 작가는 일찍이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을 비롯한 베스트셀러들을 냈고, 그녀의 <헤세로 가는 길>은 헤르만 헤세를 찾아 떠난 아름다운 감성적 여행기로 독자의 마음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정 작가의 여행 사랑과 글쓰기는 익히 잘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여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즉각적인 답이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그러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화가인 제게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데 필수적인 야외스케치가 떠올랐고, 하나 둘 제가 경험한 여행의 이력들이 물밀듯 쏟아졌습니다. 추억이 떠오르며 다시금 가슴이 콩콩 뛰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습니다.

도시에서만 자란 제가 작가로서 시야를 넓히고 내적 성장을 크게 경험한 것은 90년대 중후반 우연한 기회에 한 방송사의 여행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참여하면서 입니다. 학교에서 수업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스케치와 가족여행은 자주 있었지만, 그 이외에 여행은 기회가 없었는데 방송을 통해서 명사들과 함께 전국의 비경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 방송은 전북 고창의 선운사를 중심으로 한 여행이었습니다.

선운사는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를 읽으며 동백꽃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그 가을에는 꽃이 피면 잎이 지고 잎이 피면 꽃이 져서 서로 마주할 수 없는 상사화가 서 있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상사화의 꽃잎을 하나하나 그려나갈 때, 제 가슴도 무언지 모를 그리움으로 붉게 저미던 기억이 있습니다. 촬영이 늦어지는 바람에 허기져 있을 때, 선운사 부엌 한 귀퉁이에서 보살님이 내어 주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밥과 갓 무친 무청김치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도 알았습니다.

어느 해에는 경북 봉화의 하늘 아래 첫 동네에 갔었습니다. 얼마나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지 하늘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천국 같은 곳이었습니다. 한 할머니는 작은 돌방아에 후다닥 쌀을 찧어 따끈한 개떡을 만들어 입에 넣어주셨는데, 개떡이라 부르기 미안할 만큼 정말 맛이 좋았습니다. 어느 집에서는 뒷간을 2층 누각 구조로 지었는데, 나무판자로 만든 뻥 뚫린 변기 밑에 돼지가 올려다보고 있어 놀라기도 했습니다. 인분으로 키우는 똥돼지는 맛이 좋아 대개 주인들이 먹어버리지 팔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신기해하던 기억도 납니다.

해남에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형색색 저녁노을의 장관 앞에 무릎을 꿇었고, 붉은 빛 부드러운 흙을 맨발로 밟아보면서 왜 전통색에서 황토를 노란색이 아닌 붉은색의 의미로 사용했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벽이슬이 맺힌 푸른 대숲, 인간문화재 이생강 선생님의 대금 연주는 지금 그 가락을 기억하진 못해도 여전히 제 피부에 소름 돋듯 감동적으로 살아있습니다. 선생님의 곁에 앉아 대금의 소리가 퍼지는 작은 계곡과 나무들을 스케치로 옮기면서 다시 못 올 시공간의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일 년 남짓 진행되었던 방송을 통해 자연풍광을 바라보는 것에 그쳤던 그간의 스케치 여행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사람, 사물, 상황, 시점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보다 넓고 또한 섬세하게 바라보며 사색하는 힘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여행을 하며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 현장에서만 오롯이 남는, 설명하기 어려운 벅찬 감정과 인식의 세계가 연필 끝에 혹은 붓 끝에 실려 한 장 한 장 쌓여갔습니다. 특히 백두산 천지 앞에서 긴 화첩을 펼쳤던 순간의 떨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여행에서의 감흥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데에는 현장에서의 사생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그것은 작업을 위한 보조적인 기록의 차원일 뿐입니다. 그리는 동안 가슴에 품는 생각과 감정에 따라 연필을 잡는 악력도 달라지고, 붓으로 그리는 선묘는 미묘하게 다른 파장을 뿜어냅니다. 보이는 대로의 재현이 아니라 가슴에 닿는 대로의 재현이기에 어느 것은 강조되고 혹은 생략되며, 기세와 기운이 달라집니다.

그러고 보니 여행, 글쓰기, 그리기 이 세 가지에 똑같이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시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다르게 보고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상 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여행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축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흥이 가는 것에 초점을 두며 이야기로 글로 그림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오래 전 남해 멸치잡이배의 그물위에 빛나던 은빛 물결처럼, 여행의 소소한 추억들은 여전히 귓전에 맴돌며 순식간에 제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주고 있습니다. 여행은 내면의 나를 키웁니다. 미처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도 합니다. 벗어남, 즐거움, 때로는 후련함, 그리고 작은 깨달음이 밀려오는 여행. 한 나절도 좋고 하루도 좋고 긴 나날이어도 좋습니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여행이라는 경험은 행복이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 있음을 다시금 발견하게 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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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안진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삶의 중심은 그림이지만 그림과 함께 일상을 풀어내는 방법은 글이다. 꽃을 생명의 미학 그 자체로 보며 최근에는 ‘꽃과 문명’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당신의 오늘은 무슨색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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