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책을 읽으리 [황경춘]


죽을 때까지 책을 읽으리 [황경춘]

www.freecolumn.co.kr

죽을 때까지 책을 읽으리

2018.10.24

제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일본 수도 도쿄(東京)를 찾은 것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기 2년 전, 1943년 봄이었습니다. 서점다운 서점이 두 곳밖에 없는 시골 도시 진주(晉州)에서 간 소년에게 수십 개의 책방이 밀집해 있는 도쿄 간다(神田)의 서점가(書店街)는 큰 문화 충격(cultural shock)이었습니다.

도쿄 중심부에 위치한, ‘간다고서점가(神田古書店街)'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이 지역에는 현재도 약 200곳의 서점이 밀집해 있으며, 그중 약 140개 서점이 고서만을 취급하는 도쿄 명소의 하나입니다.

이 지역은 전시에도 미군의 공습이 없어, 옛날과 같은 밀집된 서점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이 지대를 소개하는 최근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 개화기에 설립된 메이지(明治), 주오(中央) 등 5~6개 명문 사립대학이 가까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1954년 이래 회사 일로, 또는 개인적인 일로 일본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부럽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책을 가까이하는 그들의 보편적인 생활습관입니다. 제가 어릴 때 보고 느꼈던 것이 아직 계승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독서열은 이제 그들의 민족적 전통 일부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옛날에는 도쿄 지하철이나 전차 안에서 붐비는 통근시간대를 빼고는 많은 남녀 승객들이 신문이나 책을 읽는 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풍속도였습니다. 휴대전화가 보급된 요즘에는 이 풍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스마트폰을 즐기는 젊은이 사이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승객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전과 전자책의 보급으로 많은 젊은이가 활자로 인쇄된 책에서 멀어지는 것은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불가피한 현실인데 그래도 일본인의 독서열은 우리보다는 나은 듯합니다. 오래된 책방이 하나 둘 없어질 때마다 뉴스거리가 되는 일본이지만, 인구수를 고려하더라도 일본의 신문 구독이나 서적 판매 현황은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일본에서 제일 구독자가 많은 일간지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조·석간을 합쳐 1천만을 넘는 부수를 자랑하며, 일본 최대 종합월간지인 문예춘추(文藝春秋)는 매월 평균 50만 부가 팔린다고 합니다. 
독서를 좋아하기 때문인지 그들에게는 손님에게 책을 선물하는 아름다운 습관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책 중에도 그들로부터 받은 것이 꽤 많습니다. 그중에는 게으른 제가 아직 다 읽지도 못한 책 몇 권도 있습니다. 가끔 필요할 때 들여다보는 귀중한 책도 있습니다. ‘한국역사지도’라는 책도 그중 하나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짜 만든 전연 새로운 한국의 역사’라는 대담한 광고문이 책 포장지에 들어 있는 이 책은 일본에서 잘 알려진 출판사 ‘헤이본샤(平凡社)’가 만든 것으로 비교적 공정한 기록과 설명이 많습니다.

가장 최근에 일본을 찾은 지난해 말의 시코쿠(四國) 마쓰야마(松山) 여행에서도, 한국을 몇 번씩 방문한 적이 있는 두 친구로부터 책 한 권씩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중 하나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마쓰야마 기행문으로 며칠 내에 다 읽었습니다. 다른 한 권은 좀 딱딱한 글이어서 아직 읽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타계한 집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일본어 단행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도 광복 전에 태어나 초보 일본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젊었을 때엔 일본 여성잡지의 요리, 뜨개질, 건강 등에 관한 기사를 읽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나, 소설 등 단행본을 읽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책의 저자는 소노 아야코(曾野綾子)로 ‘계로록(戒老錄)’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런 책을 사서 읽을 사람이 아닌데 하고 궁금하게 여기다 저에게도 이 일본 작가의 수필집이 있는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10여 년 전 1년에 한 번 정도 찾아가는 친한 일본 부인이 제게 선물한 책이었습니다. 그때 집사람에게는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선물로 준 모양이라는 추측을 했습니다. 두 책을 구입한 책방도 똑같았습니다.

특이한 제목이었기에 목록부터 훑어보았습니다. 지금 80대인 노작가가 40이 되면서 쓰기 시작한 노인들이 조심해야 할 언행(言行)을 메모 형식으로 제목을 길게 뽑은 색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집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에서 오는 충격을 잊기 위해서 밤늦게까지 며칠 동안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오래전에 번역되어 출판된 잭이라고 딸아이가 말했습니다.

보행이 불편해 외출을 삼가고 있는 요즘, 독서에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덕택에 책장에 오랫동안 묻혀 있던 일본인이 쓴 한국 관련 책 두 권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시력 감퇴가 심한 요즘에는 우리나라 책보다 일본어나 영문 책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것은 제가 일어나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책은 한글 전용이라 노안으로 속독을 하기에는 불편이 많기 때문입니다.

요즘 서점에서 신간 서적을 사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친지나 후배들이 책을 냈다고 보내주는 것이 제법 많습니다. 그런 책을 다 읽지 못하는 결례를 범하는 몸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돋보기를 사용해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 일본 잡지들과는 달리, 잘 읽었다는 인사말이라도 할 수 있게 다 정독하기에는 시간과 체력이 너무 부족한 늙은이가 된 자신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책은 저의 가까운 벗이며 스승으로 남을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