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있고, 지금은 없는 것 [한만수]

카테고리 없음|2018. 10. 15. 13:59


예전에는 있고, 지금은 없는 것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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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있고, 지금은 없는 것

2018.10.15

고향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추억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정자나무에서 숨바꼭질하던 추억부터, 어머니가 기성회비를 제때 주지 않아 징징 울면서 서성거리던 골목, 꾀벗고 목욕을 할 때 뛰어내리던 냇가의 장군바위, 가재를 잡던 뒷산의 계곡, 무시로 지나가는 초등학교 교문 앞에 추억을 수시로 문지르며 살게 됩니다.

추억은 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향에 사는 친구들 대부분은 지금도 아버지가 살던 터에 살고 있습니다. 가을이면 아버지가 마당에 심어 놓은 감나무에서 감을 따고 대추를 털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반추합니다.

늦가을 아버지가 이엉을 어깨에 메고 사다리로 오르던 초가지붕은 새마을 운동으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변했습니다. 지금은 옥상이 있는 슬라브 건물이 되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나, 겨울날 고드름을 볼 수 없습니다. 싸리나무 울타리 앞에 저희끼리 자라고 있던 봉선화며 접시꽃, 채송화가 피어 있던 마당은 시멘트에 덮여 있습니다. 겨울이면 나뭇단 가리가 지붕보다 높게 쌓여 있던 텃밭 옆에는 고추건조기며 저온 창고가 서 있습니다.

아버지가 새벽안개를 가르며 논으로 나가던 시절에는 10마지기 논밭만 있어도 중농 소리를 들었습니다. 요즈음은 간척지처럼 갑자기 땅이 늘어 난 것도 아닌데 인구가 줄어서 너도, 나도 10마지기 정도는 기본이고, 30마지기 정도를 가지고 있어도 땅 많다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 집이나 저 집이나 아침이면 대여섯 명씩 책보를 들고 집을 나서던 시절에는. 자식들 공부 가르치려고 겨울이면 손톱이 닳고 손바닥에 옹이가 박이도록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확이 끝나는 가을부터 언 땅이 풀리는 봄까지 겨울잠을 자듯 텔레비전 앞에서 종일 뒹굴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도 심심하면 부부나 친구들끼리 모여서 바닷가에 회를 먹으러 간다거나 밥맛이 없다며 식당에 갈비를 뜯으러 다닙니다.

아버지 대에는 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리는 운동장이 미어터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요즈음은 전교생 수가 100명 미만이 태반이라서 운동회날이라고 해 봤자, 아침부터 오일장의 파장 분위기입니다. 달리기에서도 일등부터 꼴찌까지 상을 주다 보니 상을 타도 신이 나지 않습니다. 밤이며 땅콩을 삶고 추석 때 만든 송편을 삶고 김밥을 먹던 점심시간은 학교 식당에서 육개장 한 그릇으로 끝납니다.

1960년대에만 해도 면 소재지 전체에서 한두 집밖에 없는 과수원을 한다면 동네 유지 대접을 받았습니다. 파출소 소장에 면장, 우체국장이며 의용소방대장, 수리조합장, 연초조합장, 초등학교 교장이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는 자리에 당당히 끼어서 태극선으로 부채질을 할 정도였습니다. 요즈음 필자의 고향에는 과일 농사가 주농(主農)이다 보니까 돈이 많아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네 유지가 됩니다.

봄이면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동네 사람들끼리 추렴을 해서 달구지나 리어카에 가마솥을 얹고 장작을 준비해서 원족을 갑니다. 경치 좋은 강가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돼지고기에 파를 듬뿍 썰어 넣고, 숙주나물에 고사리며 무를 동동 썬 장국을 끓입니다. 막걸리에 떡이며 부침을 먹고 나서 장구를 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여흥을 즐겼습니다.

농촌 사람들은 이런저런 경로로 ‘양띠 산악회’.‘고향산악회’,‘영농산악회’ 등 산악회 몇 군데 회원으로 활동을 합니다. 농사짓는 것은 노동이고 등산은 운동이라는 관념이 말뚝처럼 박혀 있습니다. 동네 뒷산이나 앞산 오르는 것은 일이고, 매달 관광버스 전세 내서 다른 동네 산을 올라야 운동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시절에는 기차 바퀴를 나무로 만들었다는 우스갯말이 돌 정도로 평생 서울 구경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요즈음은 부산에 ‘가덕해저터널’이 생겼다는 뉴스가 뜨기 무섭게 관광버스를 전세내서 달립니다. 저 동네 사람들이 ‘가덕해저터널’ 다녀왔는데 이 동네 사람들은 귀구경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해저터널이 개통되고 한 달이 넘지 않았는데도 어느 동네나 ‘가덕해저터널’은 “그거 별거 아니다.”라는 촌평이 스스럼없이 나옵니다.

씀씀이가 크다 보니까 농협에 대출이 없는 농가가 드뭅니다. 마이너스통장은 도시민의 교통카드 대접을 받고, 대출금 몇 천만 원, 많게는 1억이 넘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과일 농사라는 것이 판매수입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풍작이라도 가격이 폭락할 때가 있고, 흉작인데 급등할 때가 있습니다. 흉작이면 내년에 갚으면 되고, 풍작이면 기분 좋으니까 어디 해외라도 한번 다녀오든지, 자동차라도 새것으로 바꾸느라 대출금 상환은 뒷전입니다.

아버지 대에는 농협에서 대출받는 건 상상도 못 하고 해마다 1월에 나오는 농자금이 유일한 대출입니다. 이장이 농협에서 농자금을 받아오면 밤에 경작하는 면적의 크고 작음에 따라 집집마다 배당을 해줍니다.
그 돈이 멍에가 돼서 원금을 갚지 못하고 해마다 가을에 이자만 내고 대환대출을 받는 통에 자식에게 대출금을 물려주기도 합니다. “자식은 태어날 때 저 먹을 숟가락을 들고 있다”는 말을 믿고 줄줄이 낳은 자식들을 공부시키다 보니, 학교에서 수시로 날아드는 기성회비며 각종 잡부금에 손톱이 갈라지고,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도 목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어느 집이나 자식이 한 명, 많아야 세 명인 데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입니다. 그 대신 학원비다, 브랜드 옷에 운동화며 정기적으로 주는 용돈이 가정의 식대보다 많이 들어갑니다. 자식이 귀하다 보니 밥상에서 맛있는 반찬은 가장이 아니고 자식 밥그릇 앞으로 배치가 됩니다.

사자는 수사자가 먼저 먹이를 먹은 다음 암사자와 새끼들 차례가 됩니다. 사자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은 강한 쪽에 우선권이 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데, 요즘 자식들은 어미가 아이 때부터 가정의 강자로 키웁니다. 온실에서 키운 꽃은 바깥에서는 작은 비바람도 견뎌내지 못합니다.

사회에서 어른 대접을 받아야 할 6,70대가 태극기 부대에 앞장서고, 스마트폰 가짜뉴스에 중독이 되어 젊은 층들과 자주 충동을 일으키는 근본도 예전에는 있고 지금은 없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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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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