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이야기 [방석순]


생선 이야기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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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이야기

2018.10.10

마땅히 할 일도, 모임 약속도 없이 한가한 날입니다. 조용한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느긋하게 소설책을 보다가 그만 점심시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까짓것, 뭐로든 한 끼 때우면 그만이지.’ 그런데 정말 무얼 먹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웬만하면 누구든 앞장서는 데로 따라가기 일쑤였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엔 일본 식도락 만화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처럼 어슬렁거리며 식당 골목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훌쩍 큰 키에 의외로 깡마른 체격의 고독한 미식가 이노가시라 상은 무슨 음식이든 나무라는 법 없이 맛있게 잘 먹고 또 많이 먹습니다. 그래서 ‘미식가라기보다는 잡식가, 대식가’라고 은근히 흉을 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음식을 마주하는 그의 진지한 자세와 깍듯한 인사에는 절로 머리가 숙여져 꼭 배워야겠다고 다짐하곤 합니다. “잘 먹겠습니다(いただきます)!” “잘 먹었습니다(ごちそうさま)!” 하고.

“‘생선이야기’라, 저거 느낌이 좋은데.” 마음이 변해 또 헤매기 전에 얼른 식당 문을 밀고 들어섰습니다. 넓고 깨끗한 홀 안 겨우 두 테이블에만 손님이 앉아 있습니다. ‘우리네 식당이야 원래 좀 지저분하고 북적거려야 맛있는 집인데.’ 조용하고 깨끗해서 편안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메뉴 첫머리에 적힌 게 ‘고등어구이’. ‘그렇지, 생선구이의 기본은 고등어잖아.’ 그래서 선뜻 “고등어구이요!” 하고 주문하고 나니 그 아래로 죽 따라붙은 생선 모두가 먹고 싶어집니다. ‘고독한 미식가의 숙명이니 어쩌겠어. 서넛이 함께 왔으면 고등어, 갈치, 가자미, 굴비를 두루 시켜놓고 고루 먹어 보는 건데.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입맛만 쩍 다시고 홀 벽을 둘러보니 메뉴판과는 별도로 생선의 원산지 표시판이 붙어 있습니다. 보통 고깃집에나 붙여 놓는 걸로 알았는데 생선도 물 건너 온 게 많은가 봅니다. ‘세상에…!’ 잠시 원산지 표시를 살피는 순간 한탄이 절로 새어나왔습니다. 그 많은 생선 가운데 국산으로 표시된 건 오징어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고등어 노르웨이산, 갈치 세네갈산, 가자미 러시아산, 조기 러시아산, 동태 러시아산, 어묵 중국․베트남산… 삼면이 바다인 나라의 식당에서 파는 생선이 거의 다 외국산, 수입품이라니. 잠시 멍해 있다가 불현듯 휴대전화 카메라로 원산지 표시판을 찍었습니다. 그야말로 기록해 둘 만한 거리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잠시 후 주문한 고등어구이와 함께 다 먹지 못할 만큼 푸짐한 반찬이 따라 나왔습니다. 막 밥그릇 뚜껑을 여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반찬이 모자라면 말씀하세요. 혹시 뭐 잘못된 게 있나요? 사진을 찍으시게?” 저는 도리어 ‘혹시 이런 것도 초상권에 걸리나?’ 뜨끔해져서 “아, 아니에요.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파는 생선 요리가 죄다 외국산이라니 너무 신기해서요.” 하고 황급히 대답했습니다. 아주머니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아, 글로벌 세상이잖아요.” 하며 빙그레 웃습니다. 저도 마음이 놓여서 “정말 그러네요.” 덩달아 웃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수산업 사정은 그저 웃어넘길 정도가 아닌 듯합니다. 최근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빈 그물을 끌어올리며 한숨짓던 어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온난화 탓인지 남획 탓인지 근해 어장에 고기의 씨가 말랐다는 한탄이 나온 지가 오랩니다. 한여름 해변으로 놀러갔던 피서객들도 먹을 만한 횟감이 없더라고 푸념들입니다.

그러는 사이 해외에서 수입해 들여온 생선들이 우리 시장과 밥상을 점령해 가고 있습니다. ‘국민 생선’이라는 고등어마저 노르웨이를 비롯한 해외 수입산 물량이 국내산을 넘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수입 물량이 연근해 어획량의 20~30%대에 그쳤는데 올 상반기에는 70%대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식량 안보문제는 농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내 어장의 자원 보호와 함께 해외 어장 확보가 시급한 과제라는데 정부는 민생보다 정치적인 그림에만 몰두해 있는 듯합니다. 국내 어장엔 씨가 말라 가고, 가장 가까운 일본 수역은 어업협상에 실패해 3년째 출어의 발이 묶이고, 대체 어장 확보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찬 파도와 싸우며 그물을 당기는 어로 현장을 보게 되면 전선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잡는 것 못지않게 어족 자원을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동안 노가리를 명태 새끼인 줄도 모르고 술안주로 즐겨 먹던 때가 있었습니다. 동해안에 명태 씨가 말랐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최근 한 식당에서 길이 10cm 남짓한, 말린 갈치 새끼를 안주로 내놓았습니다. 아, 이젠 갈치도 씨가 마르게 생겼구나,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뒤늦게 인터넷을 열어 보니 갈치 새끼인 풀치가 별미라며 다양한 레시피까지 떠다닙니다.

‘지구 생태계 교란종은 바로 인간!’ 인간의 탐욕이 자연을 훼손하고 오염시키고 먹이사슬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바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건강한 바다를 지키기 위해 노가리, 풀치는 물론 모든 생선의 ‘치어(稚魚) 안 먹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입니다. 내일을 생각할 줄 모르는 우리의 좁은 소견과 욕심 때문에 후손들에게 황폐해진 땅과 바다를 물려주어서야 될 말입니까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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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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