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콩밝 송학선 [임철순]


내 친구 콩밝 송학선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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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콩밝 송학선

2018.10.02

토끼풀은 아주 힘이 셉니다. 잔디를 끌어안고 그 뿌리에 엉겨 붙어 살아가는 생명력이 놀랍습니다. 작고 여려 보이는데 땅 밑 여러 곳으로 벋어나간 길이가 한 줄로 펴면 2미터 가까운 녀석도 있습니다. 그 끈질김을 이기지 못해 뿌리를 다 뽑아내지 못하고 끊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잔디마당 옆 밭 주변에 있는 것들은 탈 없이 그냥 사는데 이놈은 왜 마당에 뿌리를 내려 뽑히게 된 건지, 같은 곳에 몰려 있는데 왜 어떤 건 안 뽑히게 되는지. 순전히 풀을 뽑는 내 손에 달린 일이지만, 위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면 하늘이 어떤 사람은 뽑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두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토끼풀을 뽑다 보니 점점 약이 올랐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풀을 이길 수 없는데도 다 뽑아내고 싶은 충동과 ‘분노’가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사마천처럼 고난과 역경에 좌절하지 않고 이를 창작의 에너지로 승화시킨 발분저서(發憤著書)라는 말이 떠올랐고, 그에 비하면 나는 겨우 발분발본(發憤拔本)이나 하려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전날 친구의 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콩밝 송학선(宋鶴善), 치과의사이면서 환경생명운동과 건치(健齒)운동 등 사회적 활동을 다양하게 해왔고, 시와 술과 노래, 문향(文香) 속에 살아온 동갑내기 벗. 담도세포암이라는 몹쓸 병이 1년 여 만에 그를 무너뜨렸지만 크고 폭 넓게, 한껏 멋껏 흥껏 살아온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동기인 그가 특별한 것은 나의 의사이며 내게 이름을 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10년 전 아호 갖기 운동을 제안하면서 친구들의 호를 지어주기 시작했고, 서예 입문 전일 때 내게 담연(淡硯)이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옛 어른들은 콩을 심을 때 벌레에게 한 알, 새에게 한 알, 사람들이 먹을 한 알, 이렇게 한 구멍에 세 알씩 심었답니다. 자가 충화(沖和)인 그의 호는 이런 의미를 담아 ‘콩 세 알’, ‘삼두재(三豆齋)’ ‘세알콩깍지’를 거쳐 콩밝[空朴] 공박(倥朴)으로 진화했습니다. 이외에도 숙재(菽齋) 숙암(菽庵) 기은(萁隱) 단촌(檀村, 丹邨) 둔보(芚甫) 등 호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어려서 한학의 세례를 받고 자란 그는 언제 그렇게 깊은 공부를 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유식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벗들에게 단오선(端午扇)을 선물했는데, 내 호를 크게 쓴 마지막 부채는 마음을 아리게 합니

2년 전의 송학선. 필자 촬영.

다. 어떤 친구들에게는 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흔들리는 글씨로 ‘암에 걸린 노인’이라는 뜻에서 췌우옹(贅疣翁)이라고 써주기도 했습니다.  

콩밝은 9월 5~17일 인사동에서 사진전을 겸해 ‘봄비에 붓 적셔 복사꽃을 그린다’ 출판기념회를 열고 벗들과 작별했습니다. 행사 후 열흘 만에 떠났으니 얼마나 죽음과 경주하듯 이 일에 공을 들였는지 알 만합니다. 개막 날 나를 보자마자 여위고 지팡이를 짚은 몸으로 부채 한 자루를 찾아서 주었습니다. 투병 중 여러 친구와 지인들을 위해 부채 작품을 만들면서 작별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 치대 다닐 때 바이올린을 배운 그는 선·후배들로 치과대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공연을 하러 다녔습니다. 그의 병원에는 항상 클래식 음악이 흘렀습니다. 환자가 없으면 원장실에서 한시를 읊고 짓고 평측(平仄)을 고르고, 전각을 배우고, 환갑을 넘어 거문고와 붓을 잡고 만년엔 시조창을 재미있어 했습니다. 스스로 지은 사설시조를 정간보(井間譜)에 담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전시회를 몇 번 연 사진도 프로 솜씨였습니다.  

무엇이든 시작하면 정통으로 배워 정진했고, 전문가 수준의 성취를 보였습니다. 그의 일과 생각을 이루 다 쓸 수 없습니다. 나로서는 그가 노닌 시·공간을 땅띔도 하기 어렵습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그와 나는 2학년 때 문과 이과로 갈린 뒤 각자의 길을 걷다가 환자와 의사로 다시 만났고, 최근엔 고교 선·후배로 구성된 ‘질리(테너 베니아미노 질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에서 교유(交遊)했습니다.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 작사하고 음악선생님이 작곡한 노래를 그는 추도(秋途, 가을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한역(漢譯)한 바 있습니다. “맑은 물가 한두 잎 낙엽이 지고/들리느니 개울물 소리뿐이네/타다 못해 지는 잎 내 어이 하리.”[淸涯紅葉落 但䎸滑溪聲 恨歎凋凔裎] 이 시에 대해 그는 오언절구 평기식(平起式) 경운(庚韻)이라고 설명해 놓았던데, 나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써주고 간 부채.

타다 못해 지는 잎을 내 어찌할 수 없지만, 그는 왜 그렇게 일찍 간 걸까. 왜 풀처럼 좀 더 강인하지 못했을까. 콩밝은 최근 자신의 거처에 고반실(考槃室)이라는 이름을 붙였던데, 시경에 나오는 ‘고반’은 은둔하여 산수 간을 거닐며 자연을 즐기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 이름을 지어 내 부채에 각(刻)까지 찍고 그는 갔습니다. 나는 그로부터 호를 받고도 술 한잔 내는 호설의(號說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지어준 부채의 글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인가 다른 누구인가는 자식을 장례 치르면서 “옥 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고 슬퍼했지만, 그걸 본받아 말하면 옥 같은 그대를 어찌 화장해 보냈나 싶습니다. 향년 66세. 이렇게 빨리 가지 않고 고종명(考終命)의 복을 누렸더라면 말년의 모습이 어떨지, 그가 무엇으로 어떻게 노닐었을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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