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으로 '경제'를 덮을 순 없다


'남북'으로 '경제'를 덮을 순 없다

박정훈 논설실장


평양에선 그렇게도 열려 있던 대통령이 경제엔 왜 그토록 편협하고 불통일까

왜 평양에서 했듯이 산업 현장을 누비고 기업을 껴안지 않나


  충남 당진의 농협 지점에 복면강도가 들었다. 전동 못총으로 직원을 위협해 2700여만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범인은 3시간 만에 자수했다. 놀랍게도 근처 먹자골목에서 영업하는 50대의 삼겹살집 여사장이었다. 자수 당시 그는 만취해 있었다. 빚은 느는데 장사가 안돼 홧김에 술 마시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아무리 애써도 먹고살기 힘들다는 절망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 일주일 전 벌어진 일이다.


그 사흘 전 경북 포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영세 설비 업체 사장이 새마을금고를 털다 붙잡혔다. 영주와 영천에서도 강도 사건이 잇따랐다. 범인은 모두 빚에 쪼들린 자영업자였다. 자영업의 고전(苦戰)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 선택에 내몰린 적은 없었다. 이제 우리는 식당 주인, 영세 업체 사장이 강도로 전락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외환 위기 때보다 더하다는 자영업 불황이 '사장님 강도'라는 비극적 현실을 낳았다.




문 대통령이 백두산에서 돌아온 날에도 한국 경제엔 우울한 소식이 잇따랐다, OECD는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0.3%포인트나 낮췄다. 2분기 자영업 대출은 16% 급증했고, 서울 집값은 일주일 새 또 0.26% 올랐다. 국민의 50%가 "문재인 정부 들어 경제가 더 나빠졌다"고 답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이 모두가 문 대통령이 '9·18 평양 선언'을 들고 귀국한 날 하루에 쏟아진 뉴스다.


평양의 2박 3일 동안 문 대통령은 화려한 쇼 무대의 주연과도 같았다. 전 세계가 주시하는 속에서 문 대통령은 냉전에 맞서는 주인공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김정은은 선량한 평화주의자 이미지를 연출하며 보조를 맞춰 주었다. 풍성한 볼거리와 잘 짜인 이벤트가 쉴 새 없이 펼쳐졌다. 문 대통령은 한껏 고무된 듯했다. 그 기세가 뉴욕 유엔 총회 무대까지 이어졌다. 비핵화 성과를 둘러싼 논란은 있지만 문 대통령의 '평화 투어'는 흥행 대성공이었다.


뉴욕에서 귀국길에 오른 문 대통령 마음은 남북 화해의 기대감에 부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것은 암울한 경제 현실이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어도 내리막길 치는 경제엔 변함이 없다. 서민 경제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고 일자리는 변함없이 사라지고 있다. 경제성장엔 급제동이 걸렸다. 사방팔방 악재뿐인데 위기 탈출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경제를 생각하면 문 대통령도 답답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당장 문 대통령에겐 마이너스가 찍힌 일자리 성적표가 날아갈 전망이다. 9월 고용이 사상 첫 감소를 기록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예산을 수십조원 퍼부었는데도 일자리가 늘기는커녕 줄어드는 대참사가 벌어지게 됐다. '마이너스 고용'은 이 정부 경제 운용에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산업 생산이며 투자·소비 같은 거시 지표도 일제히 곤두박질치고 있다. 부동산마저 정권 기반을 흔들 시한폭탄으로 잠복해 있다.




평양 회담 후 대통령 지지율이 급반등하자 여권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경제 실패로 고전하는 정권엔 가뭄 속 단비 같았을 것이다. 여권에선 경제도 평화 어젠다로 돌파하겠다는 내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민주당 사무총장은 "평화가 경제"라고 했다. 말장난 같은 소리다. '소득 주도'로 경제를 반쯤 죽여 놓더니 이젠 남북 이슈로 퉁 치려 한다.


평화 없는 경제는 성립할 수 없다. 그렇지만 평화만으로 경제를 살릴 수는 없다. 남북 경협이 궤도에 오르려면 온갖 험난한 조건이 성사돼야 한다. 국제사회 동참 없이 우리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면 우리 앞 경제 현실은 당장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언제 올지 모를 북한 특수(特需)를 기다리기엔 너무도 위급한 상황이다. 경제를 책임진 당사자들이 경제 살릴 정책은 펴지 않고 남북 카드로 바람만 잡고 있다. 그렇게 경제를 망쳐놓고는 "20년 집권" 운운한다. 그 오만함에 기가 막힐 지경이다.


평양 체류 중 문 대통령은 유연하고 포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평양 시민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고, 집단체조장의 군중을 향해 극찬의 헌사(獻辭)를 보냈다. 논란을 무릅쓰고 북한의 체제 선전물 공장까지 방문했다. TV 화면에 비친 문 대통령은 시종 따뜻하고 열린 모습이었다. 그것은 한반도 평화에 대한 문 대통령의 의지 표현이었을 것이다. 남북 관계에 도움 된다면 뭐든 하겠다는 각오였을 것이다.


왜 경제는 그렇게 못 할까. 평양에선 마음을 열었던 문 대통령이 경제에는 왜 그토록 편협하고 불통(不通)인지 사람들은 의아해하고 있다. 왜 평양에서 했던 것처럼 산업 현장을 누비고 기업에 다가서지 않는가. 대기업을 끌어안고 자영업 목소리에 귀 기울일 생각을 못 하는가. 나라 경제에도 북한에 하는 것만큼만 해달라는 것이 과도한 주문은 아닐 것이다.

조선일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27/20180927035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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