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을 만들면서… [정숭호]


 ‘사전’을 만들면서…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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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만들면서…

2018.09.28

칠순이 넘었으니 원로 소설가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김원우 씨가 작년 5월에 낸 ‘운미회상록’은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중전 민비의 친정에 양자로 들어간 덕에 열아홉 살에 무려 일곱 개의 벼슬을 겸직할 정도로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았던 운미(芸梶)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회상록 형식으로 된 이 소설에는 ‘어려운’ 문장이 많습니다. 다음은 대한제국 패망 직전에 상해로 망명한 운미가 젊어서 누린 권세를 후회하는 장면입니다.

“그때까지 내가 글깨나 읽고 쓰는 응석꾸러기로, 벼슬아치들이 갖다 바치는 온갖 폐물(幣物)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글겅이로, 집 부자에 누만금을 쟁여두고 사는 푸른 양반이면서도 반찬 가짓수를 줄이라고 신칙하는 재리로, 대궐의 양전이 내리는 하명을 불퉁하니 받들면서도 넙죽 집어주는 내탕고의 행하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알랑이로, 그러다가 조석으로 벼슬살이에 신물을 켜는 변덕쟁이로, 남의 글씨와 그림을 시쁘게 여기는 굴퉁이로, 개화나 사대를 주장하는 벼슬아치들 대개가 뭇방치기거나 도섭쟁이라고 매도하는 무룡태로, 세상의 형세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자만심에 놀아나는 트레바리로 살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문맥과 어감만으로 ‘대충’ 무슨 말인지는 짐작이야 하지만 곳곳에 모르는 말투성이입니다. 이렇게 모르는 게 많아서야 소설을 제대로 읽었다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나만의 사전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처음 보는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내가 원하는 대로 분류되도록 엑셀파일에 담았습니다. 수록 어휘는 많지 않아도 나에게는 우리말 사전 노릇을 해줍니다. 이 사전을 이용해 위 문단에 나오는 어려운 단어를 표로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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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이밖에도 역사적 명칭이나 관직과 제도, 한자어, 잘 쓰지 않는 속담이 굽은 소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계속 튀어나오는데, 인물을 지칭하는 단어는 위의 표에 있는 ‘인물 단어’처럼 거의가 옳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상을 담고 있습니다. 열 개를 더 골라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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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나쁜 인물을 가리키는 한자도 많습니다. 특히 나랏일을 맡은 신하들을 세분한 한자 단어는 참으로 적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간신(奸臣)만 나쁜 신하인 줄 알았더니 활신(猾臣, 교활한 신하), 유신(諛臣, 아첨이 전문인 신하), 참신(讒臣, 남을 헐뜯는 게 전문인 신하)들이 우신(愚臣, 자기 생각 없이 남의 말만 따라하는 어리석은 신하)과 구신(具臣, 아무 구실도 못하고 숫자만 채우는 신하)들 사이에서 구한말의 국정을 농단했습니다. 이런 신하들이 용군(庸君, 어리석은 군주, 고종)의 굄을 믿고 나대는 바람에 직신(直臣, 강직한 신하)과 순신(純臣, 마음이 곧고 진실한 신하), 진신(盡臣, 정성을 다하는 신하)처럼 나라에 이로운 신하들이 오히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사람들로 몰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인물 단어에만 나쁜 낱말이 있는 게 아닙니다. 형용사도 뜻이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이 더 많습니다. ‘노그라지다’, ‘소루하다’, ‘시르죽다’, ‘야지랑스럽다’, ‘애바르다’, ‘칙살스럽다’, ‘몽몽하다’, ‘시망스럽다’, ‘검측스럽다’ ‘반지빠르다’ 등등이 우선 생각납니다. 물론 제 사전에는 이보다 더 많은 나쁜 인물과 나쁜 행동거지, 나쁜 마음씨를 꾸미는 형용사들이 있습니다.

명사건, 형용사건, 우리말이건, 한자건, ‘운미 회상록’에 이처럼 어두운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 소설이 구한말이라는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어둡고 불행한 시대를 다뤘기 때문일 겁니다. 또 우리네 유전자에는 남을 추켜주고 칭찬하기보다는 깎아내리고 험담하는 ‘내림’이 더 많기 때문에 부정적이며 어두운 어휘들이 더 많아졌을 거라는 짐작도 해봅니다.

많은 분들이 요즘 세태가 구한말보다 더 어지럽다고 탄식합니다. 구한말 당시처럼 사회 곳곳에서 건공잡이나 말재기와 말전주꾼, 뭇방치기와 굴퉁이, 뭇따래기와 안다니와 앙가발이와 찌그렁이들이 제 세상 만난 듯 설치고 있다는 겁니다.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들 중에도 예전의 활신, 유신, 참신 같은 행태를 보이는 사람이 많은지라 직신, 순신, 진신 같은 사람들은 잘 안 보인다고도 말합니다.

국민들이 교묘한 말로 국민을 속이고, 민생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내가 만든 사전에 실린 낱말들로 이름 붙여 부르면 이 사람들 생각과 행동이 좀 달라지려나,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콕콕 찌르는 옛말로 불러대면 이 사람들, 아무래도 ‘야비다리(보잘것없는 자가 제 딴에는 만족하여 부리는 교만)’짓은 덜 하지 싶습니다.

#.혹시, 제 ‘사전’이 필요하신 분 연락주세요.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글, 며칠 뒤 한글날을 의식하고 쓴 건 아닙니다. 오랫동안 글감으로 ‘굴침스레 여퉈왔던’ 겁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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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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