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발[足]로 철학’하기다 [이성낙]


여행은 ‘발[足]로 철학’하기다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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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발[足]로 철학’하기다

2018.09.17

‘여행의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역마살이라도 붙었느냐”며 여행을 말리는 ‘눈총’을 의식하면서도 기회가 되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여행길에 오르곤 합니다. 필자가 여행을 하는 중요한 목적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아름다움을 섭렵(涉獵)하는 데 있기에 그 즐거움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보행(步行)을 하다 보면 정신적, 육체적 부담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특히 세계 유수의 ‘박미관(博美館, 박물관+미술관)’을 찾아가는 것부터 넓은 전시 공간에서 작품을 따라 ‘지그재그(Zigzag)’로 왔다 갔다 하며 감상하기까지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박미관’ 탐방 자체가 ‘정신적 운동’은 물론 ‘육체적 운동’을 하는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필자는 나름 여행은 “그저 놀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창(主唱)하며, 여행엔 오랜 역사의 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 한 가지 예가 고대 그리스 성현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너나없이 지중해 너머에 있는 이집트로 가서 신격화된 통치자 파라오(Pharaoh)를 만나는 것을 큰 배움의 지름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의 교통수단이나 여러 가지 여건을 생각하면 멀고 먼 여행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맨발로 고행(苦行)의 수학(修學) 길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해오는 문헌에 따르면, 그리스의 젊은 지식인 가운데 약 50%가 이집트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약 20%는 페르시아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집트에서 배워온 ‘유학의 산물’ 중 하나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수학(數學, Mathematics)이라고 부르는 학문입니다. (주해: 수학과 관련한 인도의 역할은 여기서 논하지 않음.)

그리스의 현자 탈레스[Thales of Miletus, BC 624(?) ~ BC 548(?)]가 사막에 꽂은 지팡이의 그림자를 이용해 거대 피라미드의 높이를 계산하는 방법을 깨달았다는 것은 의미가 큰 역사적 ‘이정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70 ~ BC495)는 스승 탈레스의 권유에 따라 무려 23년간이나 이집트에서 유학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피타고라스’ 하면 대부분 중학교 때 배운 ‘피타고라스 정리’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필자는 대학 시절 책을 읽다가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피타고라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선생님은 성현(聖賢)이십니다”라고 말하자 피타고라스는 “내가 무슨 성현이겠는가? 나는 지혜의 친구(Freund der Weisheit)일 뿐이네”라고 대답했다는데, 바로 여기서 철학이란 말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즉 ‘친구’·‘사랑’이라는 뜻의 ‘Philos’와 ‘지혜’·‘학문’이란 뜻의 ‘Sophia’가 합쳐져 ‘Philosophy’가 되었다는 얘깁니다. 

얼마 전 독일 지리학자 베르너 베칭(Werner Baetzing, 1949~) 교수가 쓴 “보행(步行)은 발[足]로 철학하기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짧은 문장에 담긴 큰 뜻이 필자의 마음에 스며들어 “맞아, 맞아”하며 크게 동감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낯선 외지에서 23년간 도보 여행을 하며 공부한 피타고라스가 생각났습니다. ‘피타고라스가 그렇게 오랜 기간 보행을 했으니 철학을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라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 704~787)가 떠올랐습니다. 당(唐)나라를 거쳐 인도와 페르시아 접경 지역까지 4년 넘게 순례를

독일 주간지 ‘Der Spiegel’에서( 2017.8.17.)

하며 저 유명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쓴 바로 그 혜초 스님 말입니다. 스님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행선(行禪)과 만행(卍行)을 몸소 실천한 분입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 성현들은 걸으며 생각의 폭과 깊이를 더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의사들은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의사(疑死) 상태의 환자를 보면 으레 가운 앞가슴 주머니에서 ‘나무 압설자(壓舌子, 혀 누르개)’를 꺼냅니다. 환자의 발바닥을 눌러 반사 반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를 의학 용어로 ‘바빈스키 반사(Babinski reflex)’라고 하는데, 발바닥과 뇌(腦)가 밀접한 신호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요컨대 걸으면 자연스레 발바닥에 자극을 주고, 이것이 다시금 뇌를 자극하는 효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보행이 뇌 기능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는 뜻입니다. 흔히 걷기 운동을 하면 다리 근육과 심폐 기능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여기에 더해 뇌 기능까지 활성화된다니 ‘일석삼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고로 현자들은 보행을 함으로써 현명함에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근래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걷기 운동’의 긍정적 효과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여행은 발로 철학하기’, ‘박미관 탐방은 발로 미술하기’라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발바닥이 근질거리고 머릿속에 온갖 계획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마음은 벌써 저 먼 곳에 가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게스트칼럼 /이영일

“대체 청소년은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필자는 우리 사회가 말로만 청소년이 미래의 주인공이라면서, 꿈과 희망을 키우라면서 그에 걸맞은 환경 조성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이중적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형적 입시 매몰화 교육환경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학교를 벗어나면 변변하게 갈 만한 마땅한 공간이 절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역사회 곳곳에서 학교가 아닌 마을을 청소년 체험의 장, 쉼과 놀이의 장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은 있지만 아직은 미약한 점이 많고, 여전히 청소년은 늦은 밤까지 학원을 전전하기 바쁜 게 현실입니다. 놀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청소년이 무슨 꿈을 꾸라는 말일까요.

최근 청소년들의 놀이공간을 두고 흥미로운 법원의 두 판결이 눈에 띕니다. 지난 6월, 서울행정법원이 당구장이 청소년 유해시설이라며 학교 통학 길목에 개업할 수 없다고 판결한 것과 지난 8월, 인천지방법원이 당구가 건전한 스포츠로 인식되고 있고 만 18세 미만도 출입이 허용되므로 청소년 유해시설이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 그것입니다.

현재 학교 200미터 부근은 교육환경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당구장을 개업하려면 교육청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노래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당구장이니 노래방이 청소년 유해환경이냐 아니냐는 것인데 필자는 어른들의 낡은 선입견이 청소년의 놀이문화 자체를 위축시키고 있다고 봅니다.

예전에야 당구장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담배 연기 자욱하고 어른들이 당구치며 술도 마시는 불량한 공간으로 인식된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당구장 안에서 흡연, 음주가 금지되고 당구 자체가 건강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어 가고 있을 뿐더러 전국체육대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고 있는 등의 상황인데 여전히 청소년 유해시설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노래방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학생·학부모·교사 6,9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교육환경 보호구역 내 금지행위 및 시설 유해인식도 조사연구 (연합뉴스 2018년 9월 3일 보도) 결과를 보면 노래방은 학습에 지장을 주는 정도가 25.4%로 유해성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비단 당구장이나 노래방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구장이나 노래방을 포함해 우리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이용하고 활기차게 스트레스를 발산하는 전용공간을 많이 만드는 것이 사회의 의무이자 국가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최근 청소년 주무 부처인 여성가족부가 법적 청소년 전용시설인 청소년수련관 등을 국민 불편을 해소한다며 이를 복합시설화하는 등 청소년을 위한 사회적 인식과 시선은 너무 무지하고 무성의한 것이 현실입니다. 인천 당구장은 청소년 유해시설이 아니고 서울 당구장은 청소년 유해시설이라니, 이게 웬 해괴한 어른들의 장난일까요. 어른들의 구시대적 경험과 잣대로 그나마 갈 곳 부족한 청소년들에게 놀 곳조차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대체 청소년은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필자소개

이영일

경희대NGO대학원 NGO정책관리학 전공. 서울흥사단 사무처장, 서울시청소년수련시설협회 사무국장, 참여정부 서울북부지법 국선변호감독위원, 민주평통자문회의 13~14대 자문위원 역임. 현재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운영위원으로 NGO, 청소년분야 평론활동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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