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장사익과 차 한잔 하며 [김수종]


소리꾼 장사익과 차 한잔 하며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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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과 차 한잔 하며

2018.09.12

가을의 길목에서 ‘소리꾼 장사익’과 찬 한잔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인왕산을 등지고 선 장사익 씨

장사익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노래가 ‘찔레꽃’일 겁니다. 장사익이라는 가수가 있다는 것도, 그의 노래를 들어본 것도 이십여 년 전 어느 오월 신록이 우거진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에서였습니다. 어릴 때 찔레 순을 씹어 먹으며 들쩍지근한 맛을 보았을 뿐이지 그 꽃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하얀 바지저고리 차림의 장사익이 뿜어내는 처연한 소리를 들은 후에는 ‘찔레꽃은 슬픈 꽃’이라는 이미지가 마음속에 들어차 버렸습니다. 하여간 저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지, 리듬에 둔한 나는 그에게 특별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인연이란 게 참 기묘해서 그 한참 후에 장사익 선생과 나는 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전문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별처럼 많지만 길 가다 만나면 알은척해줄 유일한 연예인입니다. 2002년 요하네스버그 유엔환경회의 시민단체 대표단 일원으로 갔다가 그와 나는 희망봉과 나미비아 사막을 같이 여행했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그가 내 출판기념회에 나와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가끔 모임에서 만날 때 나는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그는 아프리카 여행할 때 내 직책 논설위원을 따서 나를 ‘위원님’이라 부릅니다. 
지난 구월 삼일 날 세검정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정확히는 인왕산 북사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홍지동 언덕배기에 있는 그의 집 거실에서 협상을 벌였습니다.
선배 언론인이 고향 섬에서 시 낭송회를 계획하면서 “꼭 장사익 선생을 그 자리에 초대하여 ‘시와 노래’가 어우러진 행사를 하고 싶으니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덧붙여서 나와 장사익씨가 통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압박했습니다. 사실 장사익 선생과는 그렇게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고 근년에 만난 적도 없어서 적이 당황했습니다. 어렵게 장 선생과 통화가 연결되었습니다. 이외로 그는 나의 전화를 반갑게 받았고 “준비하는 일이 있어 밖에 나갈 수는 없으니, 우리 집으로 오시지요.”라며 주소를 알려주었습니다. 

협상은 실패였습니다. 장사익 선생은 대도시 순회 개인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연이 겹치지 않으면 시간을 내달라고 권유했지만 그건 음악을 모르는 문외한의 만용이었습니다. 그는 부탁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안다며 “제 노래가 모두 시에서 출발합니다. 시 낭송과 노래를 같이 묶어 하는 행사라니 구미가 무척 당기지만 제 일정상 이번에는 어렵습니다. 미안한 말씀 전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교섭은 실패했지만 그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를 좋아하는 팬들도 있겠고, 장·노년층 자유칼럼 독자들도 그의 근황을 궁금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 낭송회’로 얘기가 시작된 것을 의식했는지 자신의 노래와 시의 관계를 얘기했습니다. “제 노래는 시와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제 노래는 100% 시입니다. 찔레꽃도 제가 작사(作詞)한 것입니다. 11월과 12월 6개 도시에서 예정된 ‘자화상七’ 순회공연은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모태로 한 공연입니다.” 나이 70을 맞아 한 획을 정리하는 공연의 의미를 담겠다는 겁니다.
그는 일흔 살이 되어도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고 초청해주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그걸 절절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주름이 굵어졌고 머리에 서리는 하얗지만 그의 순수한 표정에서 정말 행복함과 진지함이 보였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대중음악에 심취하면서 가수의 꿈을 품었고, 군 복무 때 ‘문화선전대’에 소속되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제대하자 입에 풀칠하는 게 급한 그는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여러 직장을 옮겨 다니며 고단하게 일을 했고 마지막 직장이 카센터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음악을 놓아버리지 않았습니다. 제대한 후 직장에 다니면서 ‘대금’을 10년간 공부했고, 좋아하는 연주자를 쫓아다니면서 기회가 되면 보수 없이도 노래를 부르며 어깨너머로 그들의 음악을 자기 나름대로 터득했다고 합니다. 장사익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신중현과 함께 미8군에서 재즈 드럼을 쳤던 흑우(黑雨) 김대환이었습니다.
몇 년을 쫓아다녔지만 김대환은 장사익에게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기회만 되면 노래를 부르려는 장사익을 어느 날 불렀습니다. 흥분한 장사익에게 동요 송아지를 불러보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붙었습니다. “박자를 완전히 무시하고 불러봐라.”
노래가 끝나자 김대환의 입에서 욕이 쏟아졌습니다. “야, 너 인마. 속으로 박자를 생각하며 불렀지 않아! 버릴 때 사정없이 버리란 말이다.” 장사익에게 이 충고는 일생 잊을 수 없는 뼈에 새겨진 에피소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르 없이, 자유스럽게, 틀에 매이지 않은 저만의 노래가 나왔다고 봅니다. 그게 제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말문을 바꾸기 위해 인왕산 얘기를 꺼냈습니다. “여기서 보니 인왕산 북사면이 장 선생님네 좋은 정원이네요. 여기 살면 여름 폭염도 덜 느꼈겠습니다.”
그는 눈을 똥그랗게 뜨더니 “아닙니다. 지난 8월엔 문만 열면 열기가 후끈후끈 들어오는데 혼났습니다. 여기서 15년 이상 더운 줄 모르고 살았는데 올해는 참기 힘들었습니다. 기후변화로 지구가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공포감이 온몸을 휘감더라고요.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그는 반은 환경운동가였습니다.

이어 그는 “서울 시내보다는 여기가 훨씬 덜 덥습니다.”라고 동네 자랑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스마트폰을 열어 그가 찍은 인왕산 바위를 일일이 보여주다가 이미지 하나를 확대해서 내 눈앞에 내밀면서 “이 바위에서 와불(臥佛)을 찾아보세요.”

장사익 씨가 매일 바라본다는'와불상 바위'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선을 이어보니 바위틈 사이에 자란 나무가 지긋이 미소 짓는 눈, 코, 귀, 머리털로 바뀌면서 부처를 닮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독수리 부리 같은 큰 바위를 매일 바라보다가 부처의 얼굴 모습을 보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바위를 보더라도 상상하는 스타일이, 그가 행복을 찾는 방법 같아 보였습니다.

그날 협상은 실패했지만 한 시간여 동안 재미있게 그의 인생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걸 자유칼럼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어 좋습니다. 내년엔 장사익 선생이 참여하는 ‘노래가 있는 시낭송회’가 그 섬에서 열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가 있는 장사익 선생의 칠순 기념공연 ‘자화상七’이 여러 사람에게 행복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하며, 이 가을에 윤동주의 자화상을 첨부합니다. 이 시에 나오는 사나이는 ‘윤동주’나 ‘장사익’만은 아닐 것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여워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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