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으로 늘린 공무원… 출근 않고 월급 타는 '유령 직원' 21만명


세금으로 늘린 공무원… 출근 않고 월급 타는 '유령 직원' 21만명 

[아르헨티나 경제 파국]
학력·기술 기준도 없이 공직 뽑고, 결근 허위진단서가 일상화
아르헨 前정부 "빈곤층 4.7%, 독일보다 적다" 통계 왜곡 자행

  아르헨티나의 한 공립학교 기간제 교사 M씨는 학교 4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신고했다. M씨가 수업했다고 입력한 시간을 점검해보니 학교 두 곳에서 동시에 수업을 해야 가능한 '가짜 시간'이었다. 시내 공립 병원에서 일하는 B씨는 일주일에 35시간씩 근무했다고 신고했다. 하지만 병원에는 출퇴근을 기록하는 양식조차 없어 B씨의 주장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C씨는 1979년부터 30년간 국가교육관리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신고했지만, 관리국 직원 어느 누구도 이 직원을 기억 못 했다.


200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시의 일제 조사 결과 드러난 '유령 공무원' 사례다. 아르헨티나에선 출근도 하지 않으며 월말에 봉급만 받아가는 공무원을 '뇨키'라고 부른다. 뇨키는 아르헨티나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이탈리아식 감자 수제비를 말한다. 월급날이 다가오는 매달 29일 뇨키를 먹는 '뇨키의 날(Dia del Ñoqui)'에서 유래했다.

2017년 현지 비영리기관 CIPPEC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 230만명이던 공무원 수는 2014년 390만명으로 약 70% 증가했다. 아르헨티나 전체 노동자 중 18.8%가 공무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상당수가 '뇨키'라는 지적이 나온다.

뇨키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치네르 부부 대통령의 집권 시절(2003~2015년)에 쏟아졌다. 특히 2010년부터 시작된 '공공 일자리 창출(플란 아르헨티나 트라바하)' 정책은 직업이 없는 실업자 상당수를 학력이나 기술 등 구체적 기준 없이 공무원으로 채용했다.

올해 상반기까지 아르헨티나 문화부에서 차관보(Sub-secretario)로 일했던 교포 2세 안토니아 겨레 변(30) 수석장관실 비서실장은 "같은 사무실을 썼던 직원이 70명가량인데 얼굴 한번 못 본 직원만 10명이 넘는다"고 했다. 2년간 출근 한번 안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유령 공무원들은 전화를 하면 '몸이 아프다'며 진단서를 보내온다. 변 전 차관보는 "워낙 뇨키가 많아지다 보니 아예 전문적으로 허위 진단서를 내주는 병원들도 있다"며 "어느 순간부터 부작용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2015년 컨설팅 업체 KPMG 연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뇨키는 최소 21만명으로 추정되며, 연간 200억달러(약 22조5680억원)의 세금을 급여로 가져갔다.

세금으로 공공 일자리를 만드는 정책만 아르헨티나 재정을 갉아먹은 것은 아니다. 2010년에는 디지털 격차를 줄이겠다며 학생들에게 휴대용 컴퓨터를 무상 지급하기 시작했다. 2015년 7월까지 500만대의 노트북이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뿌려졌다. 연금 지급 대상자도 대폭 늘렸다. 30년 이상 돈을 부은 사람에게 지급하던 연금을 20년 이상 돈을 낸 사람도 탈 수 있게 바꿨다. 그 결과 2005년에는 360만명이던 연금 수급자가 2015년 800만명으로 늘었다.

키르치네르 정권은 전기·가스·수도 요금에도 나랏돈을 투하했다. 2005년 국내총생산(GDP)의 0.3% 수준이었던 에너지 보조금이 임기 말인 2015년엔 2.7%까지 치솟았다. 보조금 증가율이 세계 평균의 4배에 달했다. 대중교통 등 공공 서비스 분야 민간기업 보조금을 GDP 대비 1%에서 5.1%로 늘린 것도 전 정권 때였다.

정권은 과잉 복지 재원을 찍어낸 페소화(貨)로 충당했다. 넘쳐나는 페소화로 발생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통계 조작으로 숨겼다. 2008~2013년 민간 조사 기관들이 내놓은 연평균 인플레이션율은 30% 안팎이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통계청(INDEC)이 공식 발표한 같은 시기 연평균 인플레이션율은 10%에 불과했다. 2014년에는 "아르헨티나는 독일보다 빈곤층이 적다"고 선언하며 빈곤 관련 통계 집계를 중단하기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가 마지막으로 집계했던 빈곤층 비율은 4.7%였는데, 같은 때 아르헨티나 최대 노동단체인 노동자총연맹(CGT)과 민간 기관 공공정책연구소(IPyP)는 각각 30.9%, 36.5%라고 발표했다. 정부는 민간 조사 결과가 잘못됐다는 입장 발표만 거듭했다.

통계는 조작할 수 있어도 현실은 조작할 수 없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대량 실업과 구조조정을 동반하는 긴축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AP통신은 10일 "부에노스아이레스 몇몇 곳에 있는 무료 수프 배급소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고, 시 외곽에선 집에 있는 물건을 가져다 바꾸는 물물경제 시장이 부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안상현 특파원]
조선닷컴
케이콘텐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