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열성 독서가 유만주 [임철순]


조선의 열성 독서가 유만주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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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열성 독서가 유만주

2018.09.06

당송 8대가 중 한 명인 한유(韓愈)가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아들 符에게 성남에서의 독서를 권함)’을 쓴 것은 당 원화(元和) 11년(816) 가을입니다. 아마 이 무렵일 것입니다. 그 글에 나오는 ‘新凉入郊墟(신량입교허) 燈火稍可親(등화초가친)’, 가을이 되어 마을과 들판에 서늘한 바람이 부니 등불을 가까이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 이제 독서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이 9월을 맞아 유만주(兪晩柱, 1755~1788)의 일기 ‘흠영(欽英)’ 선집을 읽었습니다. 그는 20세 때인 1775년부터 1787년까지 12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쓴 사람입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라고 말했다는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유한준의 말을 정확하게 인용하면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그냥 모으는 것이 아니다”입니다.

나는 10년 전 ‘蒼厓(창애)를 찾아서 中-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암 박지원 부자와 창애 유한준 부자의 이야기를 대비해 쓴 바 있지만, ‘흠영’은 이번에야 제대로 읽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fusedtree/70085255622 참고.

유만주는 역시 대단한 독서가 교양인 평론가였습니다. 그는 “세상만사 생각해도 아무 미련 없건만/오직 책만은 버릇처럼 남았네/어찌하면 1년 같은 긴 하루 얻어/아직 못 본 세상의 책들 다 읽을 수 있을까?”라는 시를 썼습니다. “선비로서 시작부터 끝까지를/책 없이 어떻게 끌어 나가랴/농사꾼이 농사짓듯/장사꾼이 장사하듯 해야 하리/아름다운 문장을 크게 빛내고/천고의 역사를 두루 살피려네(하략)” 이런 다짐도 했습니다.

아래와 같은 문장도 인상적입니다.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고, 바라고 바라마지 않는 것은 아마도 옛 현영(賢英)의 아름다운 책과, 오늘날 세상의 순수한 인간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범흠(范欽, 명나라 때의 7만 권 장서가)의 천일각 같은 어마어마한 장서각에 앉아 달처럼 환한 안목으로 세상의 보지 못한 책들을 모두 볼 수 있을까?

그는 미성(未成)의 역사가이기도 했습니다. 4대 기서 중에서 삼국지연의를 으뜸으로 친 그는 저자 나관중(羅貫中)을 영웅이라고 했습니다. 밤에 사관이 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유사 이래 온갖 인간군상을 38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천고에 남는 역사서를 쓰고 싶어 했습니다. 요순시대부터 명나라까지 한 사람의 황제를 표제로 삼아 그 시대마다 산출된 글을 총망라하려는 구상도 합니다. 그는 사마천의 ‘사기’ 중 항우본기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소리 내어 읽어야 할 최고의 문장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마천은 천고의 문장가이지만 자신의 인물전 모음 ‘흠영태사(欽英太史)’가 편찬되면 사마천은 마땅히 그다음으로 물러나야 할 거라는 말도 합니다.

장서가의 태도에 관한 견해도 흥미롭습니다. 책을 사랑하면서도 책의 노예가 되는 걸 경계했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훌륭한 서화를 소장하고 있으면서 더 깊은 곳에 숨겨 두어야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멋진 책을 쌓아두고 있으면서 더러운 것이 묻지 않을까 근심하는 것, 서화를 늘어놓고는 문을 닫아걸고 혼자 구경하는 것, 책꽂이를 맴돌며 먼지를 떨고 책갑이나 정돈하는 것 등은 모두 똑같이 어리석고 미혹된 행동이다. 이런 무리들은 죽을 때까지 이 사소한 물건의 머슴과 노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 장서인(藏書印)을 한 번도 찍지 않았던 수학자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을 칭찬합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서적은 공공의 물건이니 개인이 사사롭게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마침 책을 모을 만한 힘이 있었기에 책이 나에게 모인 것이지만 남들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유만주는 문장에서도 독창적 주장을 했습니다. 진한(秦漢)의 고문만 답습하거나 송나라 때의 문투에 기대지 말고 ‘지금, 여기’의 글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글에 방언 속어를 피할 이유가 없다고 믿은 그는 소설을 열심히 읽고 설화 야사 야담 등 당시의 대중문화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노론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유만주는 과거에 여러 번 떨어지고 벼슬살이를 포기합니다. 운명, 외모, 재주, 세련된 태도, 재능, 재산, 집안, 언변, 필력, 의지 가운데 어느 것도 없는 십무낭자(十無浪子)를 자처했습니다. 과거제도의 폐단과 문란함을 지적한 뒤 인재 등용방식을 천거로 바꾸고, 글만 보지 말고 기능으로 사람을 뽑자는 진취적 견해도 밝혔습니다.

그의 일기는 박문다식(博聞多識)의 자료로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아들이 죽자 절망감과 슬픔에서 쓰기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병이 많았던 그는 1년 뒤 아들을 따라가듯 사망했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는 정조 시대의 사회를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과도 같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 글을 바탕으로 2016년 11월부터 3개월 여 동안 ‘1784 유만주의 한양’이라는 전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유만주의 일기를 읽는 동안, 다른 책에서 허균(許筠, 1569~1618)의 편지도 만났습니다. 34세 때인 1603년, 26세나 연상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에게 빌려간 책 돌려달라고 한 편지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빌려간 책은 언제나 되돌려 주기는 더디고 더디다‘고 했지만 더디다는 말은 1,2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史綱)’을 빌려드린 지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되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고 강릉으로 아주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렵니다. 감히 사룁니다.”

감히 사뢴다[敢白]며 할 말 다한 게 재미있지만, 유만주의 일기에 책을 빌려주고 돌려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에 의하면 ‘책 빌릴 때 한 치(瓻), 책 돌려줄 때 한 치’라고 했다는데 치는 술병입니다. 책을 빌릴 때 술병을 선사하던 풍속이 와전돼 그 말이 치(癡:바보)로 변함으로써 책 빌려주는 이도 바보, 책 돌려주는 이도 바보라는 속담이 됐다는 것입니다. 한강 선생이 허균의 편지를 받고 바로 책을 돌려주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만주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책을 냈을지, 어떤 글을 더 남겼을지 궁금합니다.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독서욕을 다지게 됐습니다. 세상엔 읽어야 할 책이 너무나도 많지만 앞으로 열과 성을 다해 최대한 많은 책을 읽으려 합니다. 그리고 빌려준 책, 빌려온 책이 없는지 다시 살펴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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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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