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속삭임 [방석순]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속삭임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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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속삭임

2018.08.31

1936년 어느 날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공연에 참석하라는 당국의 지시를 받습니다. 공연에는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 동무도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오페라는 이미 2년 여 동안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 소련 국내는 물론 미국, 스웨덴 등 해외에서 갈채를 받아 성공이 확인된 작품이었지요. 그러나 바로 그 성공이 화근이었습니다.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Pravda; 진리)에 호평이 실리며 스탈린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입니다.

공연장 지휘석 맞은편 정부 인사석에 몰로토프, 미코얀, 즈다노프 등 정권의 실력자들이 자리 잡았습니다. 작은 커튼 뒤에 앉아 있을 위대한 지도자에게 연신 아부의 몸짓을 보내면서. 그러나 오케스트라는 안타깝게도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악보에서 한참 벗어나 제멋대로 굉음을 내고 있었습니다. 4막이 시작될 무렵 정부 인사석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공연이 끝난 직후 기차역에서 프라우다를 펼쳐 든 쇼스타코비치는 아연실색했습니다.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었다! 외국에서의 성공은 오직 부르주아들의 비뚤어진 취향을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작곡가는 소비에트 관객이 음악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며칠 전까지 천재적인 작품에 찬사를 보냈던 그 신문이 하루아침에 논조를 뒤집어 험악한 비난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이 위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쇼스타코비치는 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찾아갔습니다. 플라톤 케르젠체프 위원장은 이렇게 권했습니다. 
“어리석은 젊음을 주체 못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사과하시오. 앞으로는 진실하고 대중적이며 듣기 좋은 음악에만 몰두하겠다고 말이오.”

두 번째로 찾아간 사람은 미카일 투하쳅스키 대원수였습니다. 대원수는 스탈린 동무에게 선처를 요청하는 서신을 써 주겠다며 안심시켰습니다. 그는 적군(赤軍)을 근대화한 공로로 레닌상을 받았고,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찬사를 받는 소련군의 상징이었습니다. 또한 음악 애호가로 쇼스타코비치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투하쳅스키의 서신은 끝내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봄 쇼스타코비치는 뜻밖에도 투하쳅스키 대원수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어떤 대화들을 주고받았었는지, 심문을 받았습니다. 
“스탈린 동무 암살 음모에 대해 들은 대로 이야기하시오!” 
쇼스타코비치는 그제야 대원수가 처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심문관 자크렙스키는 집요했습니다. 
“당신한테 48시간을 주겠소. 월요일 12시까지는 틀림없이 모든 걸 기억해내게 될 거요.”

월요일 다시 심문받기 위해 자크렙스키를 찾아간 쇼스타코비치를 경비병은 그대로 돌려보냈습니다. 자크렙스키가 출근하지 않았다면서. 
‘이건 속임수가 아닐까? 내 뒤를 밟아 친구와 동료들을 체포하려는 술책?’ 
쇼스타코비치는 며칠 후에야 심문관 자크렙스키 자신이 의혹을 받아 심문받는 신세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투하쳅스키의 뒤를 파는 일은 결코 접을 리 없다. 새로운 자크렙스키가 임명될 것이고, 그가 다시 나를 호출할 것이다.’ 
쇼스타코비치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투하쳅스키 대원수는 체포된 지 3주 만에 붉은 군대의 엘리트들과 함께 총살되었습니다. 스탈린 동무를 암살하려던 장군의 음모가 아슬아슬하게 제때 발각된 것입니다. 총살된 장군 측근에는 유명한 음악학자 니콜라이 질리아예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쇼스타코비치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음악학자들의 음모가 곧 발각되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 다음에는 작곡가들의 음모, 트롬본 주자들의 음모가 줄줄이 뒤따를 것이다.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세상에 온통 광기뿐인데…’

당은 끝없이 그에게 힐문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 동무, 어째서 동무가 새로 쓴 교향곡은 동무의 훌륭한 <대안의 노래>처럼 들리지 않소?” 
“왜 제1주제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친 철강노동자가 휘파람을 불지 않는 거요?”

당의 끈질긴 협박과 회유에도 쇼스타코비치는 한사코 입당을 거부하며 버텼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당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당원 볼셰비키로서 남들 눈에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당을 돕는 모습으로 비치도록 애써야 했습니다. 
아니, 만년에는 자포자기해 입당원서에 서명했고, 당이 내미는 솔제니친, 사하로프 비판 성명에도 읽어 보지도 않은 채 서명해버립니다. 당이 원하는 찬가도 수없이 작곡합니다. 그것이 자신과 음악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술사에 밝은 영국 작가 줄리안 반스가 쓴 <시대의 소음>에는 공산 압제 하의 음악가 쇼스타코비치가 처했던 상황과 고뇌가 생생히 그려져 있습니다.

‘겁쟁이가 되기도 쉽지 않다. 영웅이 되기가 오히려 더 쉽지 않을까? 잠시 용감해지기만 하면 되니까. 총을 꺼내고, 폭탄을 던지고, 독재자를 없애고, 더불어 자기 자신도 없애는 동안만. 그러나 겁쟁이가 된다는 것은 평생토록 이어지는 가시밭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자신의 타락하고 비천한 상태를 깨닫게 되는 순간순간을 기다리며. 어떤 면에서는 이런 것들도 일종의 용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가 쇼스타코비치를 숨겨주는 은신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바랐던 것은 죽음이 그의 음악을 해방시켜 주는 것, 그의 삶으로부터 음악을 독립시켜 주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 것이고 음악은 자기 힘으로 일어설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말이 교과서 속 단어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 여전히 들어줄 귀가 있다면 그의 음악은 정말 음악이 될 것이다.’
작가 반스의 해석은 비장하고 통렬합니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는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입니다. 1906년 9월 25일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975년 8월 9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심장병으로 죽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자라는 동안 페트로그라드, 성년이 될 무렵 레닌그라드, 죽은 후에는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뀌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절대 권력의 압제 하에서 15편의 교향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그의 재즈모음곡이니 로망스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곡입니다. 동시에 체제홍보를 위한 음악도 상당수 만들었습니다. 그 덕에 여섯 차례 스탈린상을 받고, 세 차례 레닌훈장을 받았습니다. 또한 여러 차례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 형식주의의 추종자’라는 비판과 사상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자신이 떠난 후 자신의 작품들이 자신의 행적과는 별개의 음악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기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자발적으로 나서든 힘에 굴복하거나 아부해서든 문화 예술이 정치 바람에 휘둘리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우리에게도 쇼스타코비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낸 인물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인물과 동시대에 살거나 애환을 함께 겪어 보지 않고서도 우리는 잘도 그들을 평가하고 칭찬하거나 비판합니다. <시대의 소음>을 읽으며, 함부로 그런 주제넘은 짓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새기게 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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