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고 맑은 글 [임철순]


시원하고 맑은 글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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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고 맑은 글

2018.08.09

오늘 8월 9일은 음력 6월 28일, 입추가 이틀 지났지만 폭염은 여전합니다. 시달리다 보니 “더워서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두보의 시가 자꾸 생각납니다. 두보가 그 시를 쓴 음력 7월 6일이 올해에는 1주일 후인 16일이고, 그날이 바로 말복입니다.

제목은 ‘早秋苦熱堆案相仍(조추고열퇴안상잉)’, ‘초가을 더위에 서류는 쌓이는데’입니다.
“칠월 엿새, 찌는 듯 괴로운 더위에/음식을 마주하고도 수저조차 못 들겠다/밤마다 넘치는 벌레만 해도 성가시건만/가을이 된 뒤에도 파리떼는 극성이네/관복을 갖춰 입고 있으니 발광하여 크게 소리치고 싶은데/이놈의 공문서는 어찌나 급하게 쌓이는지/남쪽을 바라보니 푸른 솔이 골짜기에 걸렸구나/어찌 해야 겹겹 쌓인 얼음을 맨발로 밟아 볼까.”

시에 나오는 ‘束帶發狂欲大叫(속대발광욕대규)’가 정말 실감납니다. 푹푹 찌는 폭염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있으면 미치고 환장하지 않을 수 없지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어디 시원한 글이 없나 하고 찾게 됩니다. 

읽은 게 많지 않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맨 먼저 생각나는 건 명말 청초의 재사 김성탄(金聖嘆·1608~1661)의 ‘不亦快哉(불역쾌재)’,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입니다. 장마철에 한곳에 열흘이나 갇혀 지낼 때 벗과 주고받은 유쾌 상쾌 통쾌, 이른바 쾌쾌쾌한 일 서른세 가지를 모은 것입니다. 

맨 먼저 나오는 글. “7월(물론 음력) 한더위,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에 걸리고 바람도 구름도 없고 앞뒤 뜰이 커다란 풍로처럼 달아오르는데 새 한 마리도 감히 날지 못한다. 손끝에 흐르는 땀이 이쪽저쪽으로 개울 이루듯 하거늘 밥상을 놓고도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대자리를 깔고 땅바닥에 풀썩 눕고 싶어도 축축한 바닥은 기름처럼 끈적거리고 파리는 목에도 윙윙 코끝에도 윙윙, 쫓아도 도망치지 않는다.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시커먼 수레바퀴들이 떼 지어 굴러오는 듯, 수백만 개의 금고(金鼓)가 한꺼번에 울리는듯 우르르 쾅쾅 천둥이 울리며 소나기가 내리퍼부었다. 처마 끝의 낙수는 폭포보다 더 요란하다. 땀이 걷히고 습기가 가시고 파리떼가 자취를 감추자 숟갈을 들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그리고 다른 것들. “여름철 맨머리 맨발에 양산으로 해를 가리고 있는데 문득 장정 하나가 노래를 부르며 물방아를 찧고 있다. 방앗살에서 솟아오르는 물이 하도 줄기차서 마치 은을 뒤집는 듯, 눈을 굴리듯 시원하거늘 불역쾌재?”,
“여름날 주홍색 소반 가운데 짙푸른 수박을 올려놓고 손수 쾌도를 빼어 쓱쓱 자르니 불역쾌재?”, “남이 큰 붓으로 대서(大書)를 휘갈기니 불역쾌재?”

그의 글을 읽으면 즐겁습니다. “겨울밤 술을 마시다 보니 문득 방안 공기가 싸늘하다. 창문을 여니 함박눈이 내려 이미 발목까지 쌓였구나.”,
“나그네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데, 멀리 집의 대문이 보이고 이곳저곳에서 아이와 여인들이 고향 말로 떠들고 있다.”
계절과 관계없이 시원하고 맑은 기운을 선사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자기가 한 건지 친구가 한 건지 모르겠다는 말도 마음에 듭니다.    

김성탄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될 때 “머리가 잘리는 건 아플 뿐이고 멸족을 당하는 건 부끄러울 뿐이다. 성탄은 이렇게 될 뜻이 없었으나 오호 애재라! 그러나 통쾌하도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를 ‘패설가의 잔당’이라고 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不亦快哉行]라는 연작시 20수를 쓴 걸 보면 그의 글이 아주 좋았던 모양입니다. 흡사한 것도 있습니다. 

“달포 넘게 찌는 장마 오나가나 곰팡냄새/사지에 맥이 없이 아침저녁 보내다가/가을 되어 푸른 하늘 맑고도 넓은 데다/하늘 땅 어디에도 구름 한 점 없으면/그 얼마나 상쾌할까”,
“지루한 여름날 불볕더위에 시달려/등골에 땀 흐르고 베적삼이 축축할 때/시원한 바람 끝에 소나기가 쏟아져/얼음발이 단번에 벼랑에 걸린다면/그 얼마나 상쾌할까”,
“흰 종이를 활짝 펴 두고 시상에 지그시 잠겼다가/우거진 녹음 속에 비가 뚝뚝 떨어질 때/서까래 같은 붓을 손에 한껏 움켜쥐고/먹물이 흥건하게 일필휘지하고 나면/그 얼마나 유쾌하랴.”

다산은 더위가 극심한 어느 여름날, 여덟 가지 소서법(消暑法)을 담은 칠언율시 ‘소서팔사(消暑八事)’를 지었습니다. 1)소나무 단에서 활쏘기 2)회화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 3)빈 정자에서 투호놀이 4)깨끗한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 5)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 6)동쪽 숲속에서 매미소리 듣기 7)비오는 날 시 짓기 8)달밤에 발 씻기 등입니다. 양반의 체면과 풍류로 더위를 이기는 방법이어서 고상하긴 하지만 아주 시원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달밤에도 홀랑 벗고 목욕을 하지 못하고 탁족(濯足)이나 해야 하니 딱한 일이지요. 

최근에 읽은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 선생의 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초여름 원림(園林)으로 들어가 아무 바위나 골라 이끼를 털고 그 위에 앉으니 대나무 그늘엔 햇빛이 스며들고 오동나무엔 구름이 걸려 있다. 얼마 후 산에서 홀연 구름이 피어올라 보슬비를 내리니 서늘한 기운 가없다. 의자에 기대어 혼곤히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서도 아취가 있더라.”
“서리 내리고 낙엽 질 때 성긴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둥치에 앉으면 바람결에 단풍잎이 하나둘 옷소매에 떨어지고 산새들이 나뭇가지에서 날아와 살짝 나를 엿본다. 이 순간 황량하던 대지가 맑고 운치 있게 변한다.”
“마음 맞는 벗과 산에 올라가 가부좌 틀고 시원스레 이야기하다가 바위 위에 드러누우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둥실 날아와 창공을 휘감는다. 그 순간, 참으로 행복하고 자유로웠다.”
“문 닫고 마음에 맞는 책을 읽는 것, 문 열고 마음에 맞는 벗을 맞는 것, 문 나서서 마음에 맞는 경치를 찾는 것. 이것이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이런 걸 스스로 쓸 능력이 없으니 서늘한 기운이 가없는 선인들의 글을 늘 만나고 싶어집니다. 한겨울에 너무 춥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서 “이놈의 겨울 봄 되면 보자”고 벼르던 남산 딸깍발이 선비를 본받아 “이놈의 여름 가을 되면 보자”고 말하게 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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