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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슈퍼독
2018.08.07
주인과 함께 산책길에 나선 개를 보면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생긴 모습이나 옷차림이 엇비슷한가 하면 전해오는 분위기 역시 닮은꼴이에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간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삶의 방식에 길들여져 생긴 정서적 유대, 남들은 들여다볼 수 없는 우정과 교감 때문일 거예요. 그들 사이엔 비밀의 한 자락쯤 공유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개와 주인이 교호(交互)하는 구체적 사례 중 한 가지는 개가 주인과 보조를 맞추려고 애를 쓴다는 점입니다. 뒤따라가는 개는 거리가 벌어진다 싶으면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주인 뒤에 바짝 붙습니다. 앞서가는 개는 불안하여 수시로 뒤돌아봅니다. 주인의 행보가 늦을라치면 기다렸다가 함께 가지요. 막간을 이용해 영역 표시를 하기도 합니다. 개는 주인이 다다른 후에야 안심하고 다시 걷기 시작해요.또 다른 한 가지는 개와 주인의 모습이 비슷함은 물론 성정도 닮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개가 앙증스러우면 주인도 귀엽습니다. 개가 사나우면 주인의 포스도 장난이 아니고요. 개가 날렵하면 주인도 호리호리하고 개가 수더분하면 주인도 소박합니다. 패션도 판박이죠. 주인이 자기 옷을 짓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개에게 옷을 만들어 입혀서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군요. 럭셔리한 개는 하우스 체크무늬 조끼를 주인과 나누어 입고 자랑스레 거리를 활보합니다. 프레타포르테!동네에서 종종 마주치는 개가 있습니다. 슈퍼마켓에서 손수레에 파지(破紙)를 수거하는 할아버지가 주인이랍니다. 할아버지는 검게 그을린 얼굴에 야위었어요. 개 역시 검은 색 몸통에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랐지만, 이름이 ‘슈퍼독’으로 그 부근에선 제법 유명한 셀럽(Celebrity)입니다. 마켓 직원 이야기로는 슈퍼독이 가게며 식당, 미용실을 제 집인 양 당당히 쏘다니다가 할아버지 일이 끝날 때쯤이면 용케도 알고 나타나 앞장을 선다고 해요.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와 슈퍼독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일터를 옮긴 것일까, 아니면 편찮으신 것일까? 개는 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안부가 궁금한 ‘슈퍼독’에 겹쳐 유년의 개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기르던 개인 ‘복구(福狗)’는 누런 몸통에 등 쪽 색깔이 거뭇거뭇한 볼품없는 잡견이었답니다. 게다가 꼬랑지는 반 토막이었고요. 희한하게도 고개를 뒤로 젖혀 제 꼬리를 물고 몇 날 며칠 맴을 돌더니 끊어버린 것이지요. 어른들은 자해행위를 한 복구를 미련하다고 '벅수'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복구를 달리 보게 한 신통방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마당에서 동무(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하며 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복구가 유난히 사납게 짖어댔어요. 마당 구석에 있는 시멘트로 된 장독대 입구 키 작은 우물가에서였습니다.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죠. 볕이 쪼이는 날이면 우물 위에 이불을 펼쳐 말리곤 했는데 이불이 없어진 것이에요. 그제야 복구가 다급하게 짖어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동생 녀석이 무슨 수를 썼는지 우물 벽을 기어 올라가 방방 뛰다가 이불과 함께 빠져버린 것이었어요. 동생은 연꽃처럼 깔린 보료 이불 위에서 허우적대며 자지러지게 울었지요. 우물 내부 벽면에 철근 구조물이 엇갈리며 박혀 있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폐병을 앓아 우리집 사랑채에서 요양 중이던 친척 아저씨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동생을 구조해 내었어요. 동생은 복구에게 목숨을 빚진, 죽다 살아난 녀석이랍니다. 이젠 형과 함께 같이 나이들어 가는 처지지만.복구와의 인연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5학년, 아니면 6학년 때인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복구가 달려 나오지 않았어요. 나중 어른들한테서 들으니 복구가 개장수에게 '후달려' 갔다는 것입니다. 목에 올가미를 찬 채 구슬픈 울음을 울고 있는 복구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나의 유년은 복구로 시작되어 복구로 마감된 셈입니다.첫 수필집에서 복구를 주연으로 내세워 글을 쓴 적도 있지만, 복구는 다른 에피소드를 담은 수필에서도 조연이나 까메오로 출연합니다. 동생을 ‘건진’ 복구 이야기는 그간 감추어둔 것입니다. 어린 티를 갓 벗어난 복구였지만 내 마음엔 진정한 의미의 ‘슈퍼독’으로 남아 있답니다. 요즘도 길을 가다 개를 보면 복구의 환생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한참 흐른 터에,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바라건대 세상의 모든 복구들이 ‘위태(危殆)한’ 올 여름 무탈하게 나기를.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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