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이 무너진다] "反기업·경영권 위협…이런 상황서 투자계획 꺼낼수 있겠나"


[한국 제조업이 무너진다] 

"反기업·경영권 위협…이런 상황서 투자계획 꺼낼수 있겠나"


설비투자 18년만에 최악

기업들 왜 움츠러들었나


   "툭하면 사정 당국이 들이닥치니, 기업인들 사이에 언제 공정위·경찰·검찰에 불려가 고초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솔직히 팽배하다. 반기업정책도 모자라 경영권까지 위협당하는 분위기에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겠는가. 정부가 아무리 고용 창출과 투자를 외쳐도 기업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한 중견기업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향후 투자계획을 묻는 질문에 울분을 먼저 토했다. 역대급 폭염이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 기업인들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설명이다.


투자 의사결정을 해야 할 경영인들이 이처럼 잔뜩 움츠러들면서 투자와 생산 지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6월 산업생산이 석 달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설비투자 감소세는 2000년 이후 가장 길게 이어지면서 `투자 절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문제는 외부 요인보다는 우리나라 내부 요인 때문에 기업들이 투자를 머뭇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 현장에서는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 법인세 인상까지 기업 투자심리를 위축시키는 정책이 이어지고 반기업정서까지 확산되면서 경기지표 악화는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적폐청산에서 시작한 재벌·대기업 개혁 정책이 갈수록 강화되고, 사정 기관들이 먼지떨이식 수사까지 벌이면서 기업들은 투자보다는 지배구조 재편 과정에서 경영권을 지키는 방안을 찾는 데만 골몰할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이다. 국내 대기업의 한 고위 임원은 "내부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고 이미 여러 차례 검토해서 판단을 내렸지만 워낙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지다 보니, 윗분들부터 그룹 내 핵심 임원들까지 온통 관심은 `경영권`에 쏠려 있다"며 "당장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냐. 이런 상황에서 누가 불확실성이 높은 대규모 투자 얘기를 꺼낼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올해 들어서만 9번 압수수색을 당했고, 현대차그룹, LG그룹 역시 사정 당국 압박에 긴장하는 모양새다. 올해 2월 신동빈 회장이 구속된 롯데는 경영권 공백 사태에 빠져 그룹 내 중요한 의사결정이 올스톱된 상황이다. 


기업과 기업인들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갑질`하는 집단으로만 바라보는 시각도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키고 있다. 일부 기업들 일탈을 시장경제 결함으로 인식하고 경제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다. 


반기업정서가 팽배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하는 대신 기업들은 대거 지배구조 개편에 나서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재계에 따르면 지배구조개편안을 발표하거나 추진하는 곳은 10개다. 현대자동차에 이어 한화·효성 등이 지배구조 개선에 나섰고, 상당수 대기업들이 기업 지배구조 개편을 마무리지었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 압박에 재계가 발 빠르게 대응해 기업들이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는 과정에서 일부 기업은 자사주 매입을 위해 수조 원을 투입하기도 했다"며 "지배구조 개편 압박이 거세지면서 여기에 역량을 집중하다 보니 아무래도 투자나 일자리 창출은 경영진 관심에서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 19일 제주포럼에 참석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투자와 고용 등 기업 활동이 얼어붙은 이유에 대해 그는 "대다수 기업들의 체감경기가 좋지 않은 데다, 경제심리를 더 어렵게 만드는 (정부와 국회의) 각종 조치들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근본 처방 없이는 거시지표의 경고음은 계속될 것이며, 소모적인 논란이 생겨나고, 경제는 내리막길에 놓이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게 박 회장의 경고다. 홍성일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정책팀장은 "반도체나 일부 디스플레이 등 호황 산업 분야를 제외하고는 기업들이 있는 설비도 가동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투자할 여력 자체가 없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기업이 투자를 멈추자 협력업체들인 중소기업은 더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차량용 조명을 만드는 디에이치라이팅의 채희철 대표는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실적과 별개로 기업 전망이 좋아야 하는데 지금은 다들 부정적으로 전망하고 있다"며 "자동차용 할로겐전구 판매는 호조를 보이지만 아직은 여기에 재투자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금속가공 중소기업 A사 대표도 "건실한 기업은 해외에서 경쟁해야 하는데 최저임금 인상·근로시간 단축 등 기업을 힘들게 하는 정책만 반복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A사는 지난해 400만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1년 내 일하고도 결국 적자만 기록한 셈이다. 


`제조업 엑소더스`에 대한 우려도 높아진다.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심화된 고비용 구조와 반기업정서에 아예 해외로 짐을 싸는 사례도 늘고 있다. 반면 해외로 나간 국내 기업의 유턴(리쇼어링)은 지난해 4곳에 그쳤다. 경남지역 조선 및 자동차 부품 기업 B사 대표는 "전방산업 부진이 이어지다 보니 투자의욕이 일어나질 않는다. 지금 있는 공장도 어려운데 투자는 언감생심"이라며 "정책이 기업하기 어려운 방향으로만 가니 공장을 지어도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경우가 늘었다"고 했다. 


기업의 미래를 준비하는 연구개발(R&D) 투자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한국은행이 지난 26일 발표한 `2018년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 속보치를 분석한 결과, 2012년 이후 6년 만에 건설투자, 설비투자, 지식생산물투자 모두 전기 대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특히 좀처럼 마이너스를 기록하지 않는 지식생산물 투자가 3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을 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 52시간 근로 도입과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제조업체들의 인력난도 사상 최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이 31일 발표한 `2018년 7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보면, 제조업체들의 경영 애로사항이 `내수 부진`(20.9%), `인력난·인건비 상승`(14.2%) 등 순으로 조사됐다. 


김현수 대한상의 산업정책팀장은 "아무래도 투자는 심리적인 요인이 큰데, 기업들로서는 대내외적인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과감한 투자를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정부도 신산업 분야에서 규제를 풀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투자도 고용도) 꽉 막힌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순민 기자 / 송민근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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