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버리셔야지 [김창식]



책은 버리셔야지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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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버리셔야지

2018.06.19

지난 4월 3일자 제가 쓴 칼럼 <내가 누군 줄 알고> 기억하시는지요? 아파트 살다 변두리 지역 다세대주택으로 이사하여 조우한 주민과의 해프닝을 쓴 글이었어요. 본인 스스로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는 주제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다니까”라며 남 탓을 한 내용이었어요. 사실은 그 말이 끝이 아니었답니다. 투덜거림이 이어졌어요. “못사는 동네는 쓰레기 때깔도 다르다니까.” 며칠이 지나서도 사내의 말이 한동안 머리에 맴돌았어요. 자괴감도 들고요. “내기 이러려고 이사 왔나!”

다음은 역시 이사 온 후 겪은 닮지 않은 듯 닮은 이야기입니다. 이사 서너 번 안 다녀본 사람 없으시겠죠? 그리고 무겁기 짝이 없어 골치 아픈 이삿짐 품목 중 으뜸이 ’책’이라는 것도 아실 테고요. 얼추 헤아려보니 천 권도 넘어요. ‘서당 개 3년’은 아니지만 글 쓰는 계통에서 10년이니 하긴! 문제는 책을 비치할 공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집을 줄이고 줄여 온 터에 서재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고 그렇다고 침대 위아래에 매트 대신 깔아 놓을 수도 없잖아요. 의식주와 원만한 가정생활이 우선이니까요. 그래 버리자! 종이야 아깝다! 나무야 미안하다! 그같이 자위해보아도 가슴 한구석에 스산한 바람이 이는 걸 어쩔 수 없었답니다.

일단 응접실 겸 부엌 겸 거실에 책을 질펀하게 퍼질러 놓았죠. 그로부터 일주일 넘게 책과의 눈물겨운 사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렇다 해도 보관해야 할 책은 보관해야겠죠. 내가 쓴 글이 실린 책이나 ‘지금 안 보더라도 혹시’ 하는 책 말이에요. 뭐 나중에도 보지 않겠지만. 옥석을 가리는 작업 또한 보통 피곤한 일이 아녜요. 일단 이런 책이 있었나 의심이 드는 책, 성격과 정체성이 모호하거나 보내 준 사람이 불분명한 책, 다음은 잡지 타입 문예지가 퇴출 대상이었어요. 다음, 그리고 또 다음은…. 지식 노동이 한계점에 이르자 이 책 저 책 가릴 것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제쳐놓았죠.

그러는 사이 책과 보내 준 사람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은 오간 데 없이 짜증도 나고 몸과 마음이 ‘제대로’ 지치기도 해요. 책을 분류하다 깜빡 졸기도 했다니까요, 글쎄. 잠에서 설핏 깨어나면 ‘책의 바다’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가 된 듯 막막함에 사로잡히기도 했죠. 어쨌거나 폐기로 분류된 책은 날름날름 슈퍼에서 허가 안 받고 들고 온 박스에 대충 넣어 밖에다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박스가 없어져요. 이렇게 책이 인기가 있나? 누가 책을 좋아하지? 의아했어요. 한편으로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별에 좋은 이별은 없는 법이잖아요. 죽음에 호상(好喪) 없듯. 그러길 얼추 일주일 넘게 지나다 보니 책이, 아니 집 안이 좀 정리가 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짐을 정리하다 바깥으로 나와 쓰레기 분류장인 옆 허접한 공간에서 쉬고 있는데 누가 작은 수레를 밀고 나타났어요. 폐지 수집 아저씨인가 봐요. 듬성듬성 거친 수염이 돋았는데 힙합 모자를 쓴 모습이 특이했죠. 쓰레기 더미를 뒤적이던 사내가 알은체를 해요. 다음은 두 사람 간에 오간 조금은 비우호적인 대화를 순화해 옮긴 것입니다.

“여기 이사 온 분이쇼?”
“아, 예. 고생 많으십니다.”
“책 버리신 분 맞나요?”
“아, 예. 그렇습니다만.”
"근데 요샌 책이 왜 안 나와요?”
“아. 예. 대강 정리가 끝나서요.”
“그래도 책은 버리셔야지. 다른 건 몰라도.”
“예? 아니, 무슨 말씀을?”
“그나마 책이 돈이 좀 되거든요.”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혼잣말이 이어졌습니다.
“그래야 우리 같은 사람도 먹고살지.”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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