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방석순]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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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2018.05.23

사회생활에서 원칙과 상반되는 개념은 무엇일까요? 무원칙? 타협이나 흥정? 아니면, 융통성?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서는 대중교통 환승제도와 버스전용차로제가 실시되면서 시민들의 교통이 훨씬 편리해졌습니다. 목적지로 가는 동안 여러 번 버스나 지하철을 갈아타도 교통비를 중복 부담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예전처럼 버스가 제 편한 대로 정차했다가 휙 떠나버리는 경우도 없으니 놓칠 염려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류장 앞쪽 자리를 훤히 비워 두고도 중간쯤에 정차하는 버스가 적지 않습니다. 같은 정류장에서 늘 그러는 걸 보면 탑승객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거의 습관적인 것 같습니다. 도리 없이 버스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가 타야 합니다. 운전기사 뒤통수에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싶어집니다.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마다 맨 앞쪽 자리부터 채워 나간다면 승객들도 그 원칙에 따를 텐데 말입니다.

승객에게는 버스 앞문으로 타고 뒷문으로 내리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질서를 지킨다면 분쟁도 없고 마음도 편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좌석을 먼저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뒷문으로 승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앞문에서 차례를 기다려 승차한 사람들은 자연 그런 얌체족들에게 눈을 흘기게 됩니다. 운전기사들도 손님이 내리는 대로 뒷문을 단속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 빨리 타고 내리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인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입니다.

공중생활에서 원칙을 내세우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존중할 기준을 둠으로써 불필요한 혼란을 방지하고 보다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원칙을 무시하고 누구나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혼란과 불편과 낭비가 불 보듯 뻔합니다.

친구들과 설악산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동해안 횟집에서 기분 좋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나른해진 오후 뻥 뚫린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초현대식 미관을 자랑하는 내린천휴게소를 만났습니다. 졸음 운전의 위험도 덜 겸 차를 빙 돌려 휴게소로 들어갔습니다. 현관 초입의 식권 판매소에서 커피 파는 곳을 물어보니 “저 안쪽 전망대로 들어가시라”며 친절하게 안내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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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키는 쪽으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커피 내리는 기계가 보입니다. 커피 몇 잔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니 스크린에 우리의 주문번호가 뜹니다. 으레 하던 대로 혼자 다가가서 커피를 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챙겨줄 것으로 알았던 쟁반이 없다고 합니다. 커피를 내어준 젊은이에게 “그럼 혼자서 이것들을 어떻게 들고 가지요?” 하고 물으니 “글쎄요. 하여튼 저희는 커피 전문점이 아니어서 원칙적으로 쟁반 같은 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젊은이의 응답에 은근히 열이 나서 “아니, 그럼 여긴 커피 파는 곳이 아닙니까?” 했더니 “네, 여기는 샌드위치 전문점입니다.”라고 덤덤하게 답합니다.

‘그럼 커피를 팔지나 말든지…’ 혼자 구시렁거리며 일행을 불러 와야 하나 어쩌나 망설일 때였습니다. 가게 안쪽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쟁반이 필요하시지요?” 하며 잽싸게 쟁반 하나를 가져다줍니다. 쟁반에 커피잔을 받쳐 들고 힐끗 청년 얼굴을 들여다보았더니 웬걸,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아이구, 저렇게 꽉 막혀 가지고 세상 어떻게 살지?’ 융통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젊은이가 딱해 보였습니다.

사회생활에서는 원칙도 필요하고 융통성도 필요합니다. 융통성은 자기 편익을 위해 원칙을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남을 위한 배려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또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을 당했을 때 고지식하게 원리원칙에만 얽매여서는 그 일을 원만히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생활에서의 원칙과 융통성은 상반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칙이 지켜져야 할 곳에서 융통성을 부르짖고, 융통성이 발휘되어야 할 곳에서 원칙을 따지곤 합니다. 또 내가 필요할 때엔 융통성을 앞세우고, 남의 일에는 원칙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래서 ‘내로남불’의 시비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나야말로 ‘내로남불’의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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