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미북 조미(朝美) [임종건]


북미 미북 조미(朝美)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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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미북 조미(朝美)

2018.06.15

국내 매체들이 '북미회담' 또는 '미북회담'이라고 각기 다르게 부른 북한과 미국 간의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안긴 채 끝났습니다. 대부분의 매체가 '북미회담'으로 쓴 것과는 달리, 보수 우익 성향의 조선일보 문화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 등이 미북회담으로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북미로 쓰는 매체 중에는 보수 우익은 물론 중도 진보 쪽의 매체들이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보편적으로 써온 용어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컴퓨터 자동교정기에서 ‘북미’는 통과되지만 ‘미북’은 걸리는 것으로도 확인됩니다.

북미와 미북이 표기 순서만 다를 뿐, 같은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이 남북관계를 ‘북남관계’라고 쓸 수 없고, ‘한미일’ 관계를 ‘한일미’  관계로 쓰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제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미일’에서 미국을 중국으로 대체하면 ‘한중일’이지 ‘한일중’이 아닙니다. 정부 수립이후 한일관계는 한중관계보다 훨씬 오래고 긴밀했지만, 1992년 한중 국교정상화 이후 한중경제교류가 사활적인 중요도를 갖기 시작하면서 한국 언론들은 중국을 일본보다 앞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한일 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갈등이 영향을 미친 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국가 간의 관계에서 배열의 선후 위치는 관계의 중요도와 호감도를 반영합니다. 중요도를 구성하는 요소가 정치 안보 경제라면, 문화 역사 전통 등 정서적 요소가 호감도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북관계'라고 쓰는 한 언론사의 해당 부서인 국제부에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주저 없이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한미동맹이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북미관계'로 쓰는 언론사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북한이 대한민국의 안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상대인데다, 싫든 좋든 언젠가 통일해야 할 동족의 나라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북미든 미북이든 6·12회담이 열리기까지는 매체별로 논조에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북한의 비핵화가 순조롭게 진전되면 그런 상황도 지속될 것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후순위 국가로 돌리며 서로 대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6·12회담에 대한 평가에서 이미 그런 조짐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미 미북에다 새롭게 등장한 것이 ‘조미(朝美)관계’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5월 26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가졌던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조미회담’이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했습니다.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체제를 보장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 왜 한국과 조선, 즉 ‘한조(韓朝)’로 불려야 할 약칭이 ‘남북한’으로 불리게 됐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북한의 국명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은 괄호를 포함해 17자로 매우 깁니다. 남한의 '대한민국(ROK)'도 9자나 됩니다. 국호를 각각 두자로 줄인 것이 ‘한국’과 ‘조선’이고, 남한의 매체들은 그것을 세글자로 합쳐 ‘남북한’으로, 북측에선 ‘북남조선’으로 부르게 됐습니다.

남한(South Korea)과 북한(North Korea)은 원래 서방 언론들이 쓰기 시작했습니다. 간편하고 알기 쉬운 것을 선호하는 미국식 실용주의적 발상이었습니다. 국내 언론들이 ‘남북한’으로 표기하는 것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 이후 남한에서 북한을 단독으로 지칭할 때는 대개 북한괴뢰를 줄인 ‘북괴(北傀)’로 썼습니다. 북한도 남한을 ‘남조선 괴뢰’라고 했습니다. 서로를 꼭두각시 정권으로 부르며 적대했습니다. 북한은 중공과 소련의 꼭두각시였고, 남한은 미국의 꼭두각시였습니다. 그런 관행은 이승만 정부 이후 노태우 정부시절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 시대에 기자였던 필자는 ‘남북한’으로 쓰게 되면 이런 필요 이상의 적대적 용어를 안 쓸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한국’과 ‘조선’으로 국명에서부터 이질감을 부각시키는 것은 통일정신에 반한다는 생각도 했고, 북한이 국호로 쓴 ‘조선’(조선 왕조가 아닌 고조선)이 우리 정서에 생경하다는 인식도 있었습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처럼 우리 내부에서도 왜 ‘대한민국’ 또는 ‘한국’이라는 정식 국명을 안 쓰고 ‘남한’으로 쓰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북한’이라는 호칭에는 통일지향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조선’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하지만, 북한 스스로도 ‘남북관계’를 말할 때는 순서만 바꾸어 ‘북남관계’라고 합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북미회담’이라고 해도 충분한 것을 굳이 ‘조미회담’이라고 한 것은 최소한 국민 정서상으로 어색합니다.

청와대가 문 대통령의 발언 속의 ‘조미회담’을 발표문에서는 ‘북미회담’으로 했다가, 언론들의 문제제기 이후 다시 ‘조미’로 바꾸는 등 오락가락한 것으로 미루어 이런 문제점을 모르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과 ‘조선’은 앞으로 통일한국의 국호가 무엇이어야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자는 것은 우리 내부에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는 원인이 될 따름입니다. 우리가 굳이 '조선'이라고 쓰고 말하는 것에서 북한의 실체를 인정할 게 아니라, '남북' 또는 '북남' 속에 '북한'이 남아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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