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에 할 수 있 일, 말레이시아 총리 [허찬국]


구순에 할 수 있 일, 말레이시아 총리 [허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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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에 할 수 있는 일, 말레이시아  총리

2018.06.01

작년 11월에는 구순(九旬)이 넘은 짐바브웨의 독재자 무가베가 내부 정변으로 물러나 화젯거리였습니다. 올 5월에는 다른 구순의 정치인 마하티르가 말레이시아의 야당 연합 지도자로 나서 한때 자신이 이끌던 정당의 장기 집권을 종식시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노욕으로 국민들을 희생시킨 비극이었다면, 후자는 구순의 지도자가 과거의 실수를 보정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성공담 느낌입니다. 

지난달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집권당 UMNO(통일말레이국민조직)가 희망연대(Pakatan Harapan)라는 야당 연합에 대패하며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1957년 영국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이후 60년 넘게 집권했던 UMNO가 다수당 지위를 잃고 권력에서 밀려나는 일은 누구도 예상치 않았던 경천동지(驚天動地) 사건이었습니다. 집권당은 선거 전 대규모 매표(買票)와 비판적 정권 내부 및 야당 세력과 언론을 억압하는 행태를 보였음에도 야당 연합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요즘 우리식 표현으로 적폐가 어마어마할 터인데, 이 드라마 주연들의 면면과 과거의 인연이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켜줍니다. 주연을 맡은 3인은 2009년부터 총리였던 64세의 나집 라작,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 간 총리로 재임했던 92세의 마하티르, 그리고 2년 내 정권을 이양받기로 되어 있는 70세의 안와르 이브라힘 희망연대 지도자입니다. 이들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역들에 버금가는 야욕과 애증의 배역을 맡았습니다.

나집은 말레이사아 2대 총리의 아들로 교육을 영국에서 받은 식민국가 엘리트의 전형입니다. 명문가 집안의 후광이 주효했는지 2009년 총리로 선출됩니다. 집권 후 말레이 원주민을 중국계·인도계 국민보다 우대하는 UMNO의 정책과 공권력을 잘 이용하면서 정권을 유지했고 일당독재를 노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집 정부의 부정부패는 60년 넘게 유지되었던 실질적인 일당 집권의 종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1MDB 스캔들입니다. 2009년 수도 쿠알라룸푸르를 금융의 허브로 만들고 국가 발전을 위한 전략적 투자를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나집 총리가 설립한 국영투자기업입니다. 하지만 그사이 나집과 친지들이 엄청난 금액의 돈을 이 기업의 기금에서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데, 실제 미국 정부는 부정하게 사용된 거액을 압류하려는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7억 달러가 넘는 돈이 나집의 개인 계좌로 흘러갔다는 증거가 나와 말레이시아에서도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무혐의로 처리되었습니다. 부정부패의 한 면모는 선거 직후 이루어진 총리 주거지에 대한 수색에서 경찰이 2,600만 달러의 각종 외화와 많은 양의 고가 시계, 가방 등을 압수하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선거 결과는 정치 지도자의 끔찍한 부정과 철면피 행보에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분노가 엄청났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마하티르는 총리 재직 시 말레이시아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높이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임기 중 발생했던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다른 위기 경험국들과 달리 IMF의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버티었고, 미국과 서방 자본에 대해 개도국 위기를 기회 삼아 폭리를 취한다고 신랄히 비판하면서 한국에서도 유명해졌습니다. 그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6년 만에 나집이 총리가 되었지요.야당 지도자로 변신한 마하티르가 5월 총선 전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에서 자신이 나집을 후계자로 삼은 것이 인생의 제일 큰 실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2016년 나집 정부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며 UMNO를 탈당했고, 올 1월 희망연대의 총리 후보로 지명되며 본인이 지목한 후계자와 몸담았던 정당을 권좌에서 몰아내기 위해 야당 연합의 지도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야당은 UMNO의 원주민 우대 정책을 대폭 완화하여 더 개방된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구순의 나이가 무색하게 그는 왕성한 유세활동을 했습니다. 마하티르는 과거 총리 재입 시 철권정치를 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야당 지도자로의 변신은 과거 자신이 투옥했던 정적이나 비판적 인사들과 한 배에 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정적은 안와르 이브라힘입니다. 1998년까지 재무장관 겸 부총리로서 자신의 후계자였던 그를 마하티르는 회교국에서 심각한 죄목인 동성애자라는 혐의를 만들어 파면했고, 재판과 투옥이 이어집니다. 안와르는 말레이시아의 경제발전에 공헌이 컸다는 평가를 받아 인기가 있었고, 카리스마가 있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아직 권력을 넘길 생각이 없었던 마하티르의 강한 견제에 희생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04년 대법원의 무죄 판결이 있기까지 수감생활을 했는데 그 이후에도 안와르의 정치활동에 위협을 느낀 여당이 같은 혐의를 되살리는 바람에 여러 차례 재판과 수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선거 때마다 의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집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으로 보였지요. 2015년에 동성애 혐의로 5년 형을 선고받아 이번 5월 총선 때에는 수감된 상태였습니다. 본인은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장녀가 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선거 전 마하티르는 집권하면 안와르 이브라힘을 사면·복권시키고 2년 내에 총리직을 이양한다는 약속대로 총선 직후 국왕에게 요청하여 안와르가 자유로운 처지가 되었고 하원의 다수당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선거 직후 출국하려다 저지당한 나집 전 총리 부부는 조사와 재판이 있은 후 아마도 긴 시간을 갇혀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종의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장편 연극을 본 느낌입니다. 교훈은 나집 같은 정치인이 되지 말 것이며, 또 대부분 사람들에게 마하티르처럼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가 오지 않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고작 70, 80세에 무력감에 시달리는 분이 계신다면 구순의 마하티르를 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총리가 아니더라도 동장이라도 시도해 보시지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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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중. 개방 경제의 통화, 금융, 거시경제 현상이 주요 연구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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