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냉국이 있는 점심상 [한만수]


오이냉국이 있는 점심상 [한만수]

www.freecolumn.co.kr

오이냉국이 있는 점심상

2018.05.28

한국 사람들의 식 개념에서 ‘밥’은 ‘쌀’이나 ‘보리’ 등의 곡식을 씻어 솥 같은 곳에 안친 후, 물을 붓고 낟알이 풀어지지 않을 만큼 끓여서 익힌 음식을 말합니다. 같은 방법으로 음식을 익히더라도 너무 많은 물을 넣어서 끈기가 없으면 ‘죽’이라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너무 적게 넣으면 ‘떡’이라고 합니다. 또 ‘밥을 먹었냐고' 물었을 때 밥 대신 끼니가 될 만한 라면이나, 빵, 혹은 시리얼 같은 것을 먹었을 때는 ‘밥 먹었다’는 대답보다 ‘라면을 먹었다'고 대답을 합니다. 밥은 한국 사람에게 그만큼 중요한 끼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만 해도 아침저녁으로 만나면 하는 인사가 “밥 먹었느냐” 라는 말이었습니다. 요즈음은 경제 사정이 좋아진 데다 식생활도 서구화 돼서 밥 먹었냐는 인사를 받는 경우는 드뭅니다.

밥은 반찬과 같이 먹습니다. 밥과 반찬을 같이 먹는 나라는 아시아권입니다. 빵을 주식으로 먹는 서양권은 빵을 주식으로 하고 고기를 곁들여 먹어도 반찬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버무려서 주식으로 봅니다. 중동권에서도 빵과 생선 고기 밥 등을 다양하게 먹지만 우리처럼 밥과 반찬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찬을 배부르게 먹어도 밥을 먹지 않았으면 ‘밥 먹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은 빵만 먹든 고기만 먹든, 빵과 고기를 같이 먹든 배를 채웠으면 밥을 먹은 것으로 인식을 합니다.
반찬은 경제적 사정이 좋을수록 양보다 질을 우선해서 만듭니다. 잘사는 집은 유기농이나 신선하고 몸에 좋은 재료들로 반찬을 만들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김치에 된장국만 있어도 밥 먹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60년대는 밥상에 오르는 반찬들은 특별한 날들, 명절이나 손님이 오시거나, 생일날 등을 제외하고는 집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만듭니다. 봄에는 들판이나 산에서 뜯어 온 냉이며 달래며 쑥이나 취나물이며 고사리, 가죽나무순 같은 것이 반찬으로 올라옵니다.

여름에는 호박잎이며 오이에 가지나 상추, 열무김치, 부추무침 등이, 가을에는 얼갈이배추나, 알타리무김치, 쪽파, 아욱 같은 것이 밥상에 오릅니다. 겨울에는 초지일관 김장 때 담근 배추김치에, 무김치, 동치미에 된장국이나 콩나물국이 밥상을 굳건히 지킵니다.

겨울에 눈이 오는 날이면 가끔 어렸을 때의 저녁밥상이 생각납니다. 해는 지고 캄캄한데도 눈은 소리 없이 소복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희미한 30촉 전등불 아래 둥근 호마이카상을 가운데 두고 가족이 둘러앉아서 저녁을 먹습니다. 반찬이라고 해 봤자, 된장찌개에 김장김치, 무김치, 동치미와 간장에 고추장이 전부입니다.

주먹만 하게 썬 무김치를 젓가락으로 푹 찍어 들고 오른손으로는 밥을 먹으며 한입 덥석 깨뭅니다. 아삭거리며 무가 씹히는 소리며, 뚝배기에 담긴 된장찌개와 밥그릇을 부지런히 오가며 숟가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젓가락을 밥상에 내려놓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어 맛있는 음악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무심코 매운 지고추를 한입 덥석 물었다가 입안에 순식간에 퍼지는 매운 맛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머니에게 혼날까 봐 맨밥을 막 퍼먹던 기억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흔한 김도 그때는 귀한 반찬이었습니다. 제삿날이나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밥상에 김이 오르면 어머니가 몇 장씩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식성에 따라서 김부터 먹는가 하면, 나중까지 남겨두었다가 밥이 몇 숟가락 남았을 때 입안에 고소하게 퍼지는 향을 즐기는 형제도 있습니다.

여름이면 오이냉국을 자주 먹었습니다. 오이냉국이 메인메뉴로 밥상에 오르는 점심때는 어머니께서 찬물을 길어오라고 하십니다. 산골 같은 동네는 주로 공동우물을 사용하고, 면 소재지 동네는 잘사는 집 마당에 우물이 있습니다. 양동이를 들고 땡볕이 직선으로 머리 위에 내려쬐는 길을 걸어서 우물이 있는 집에 갑니다.

일본식 정원이 있는 집 대문 안은 항상 정적이 흐릅니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들어가면 지붕이 있는 우물이 있습니다. 지붕 밑에 도르래가 달려 있는 우물은 너무 깊어서 밑을 내려다보면 컴컴해서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르레줄을 무조건 밑으로 내립니다. 두레박이 수면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고, 잡고 있는 도르레줄이 팽팽해 질 때쯤 잡아당기기 시작합니다. 일단 양동이부터 차가운 물을 가득 채우고 남은 물로 목을 축입니다.

양동이 가득 담긴 물을 들고 땡볕 속에 걸어가면 금방 땀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얼굴이며 등에 땀이 흐르면 양동이 물이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땀을 흘리며 집까지 들고 가면 어머니께서 “우리 아들 더운데 물 길어 오느라 수고했다.” 고 칭찬을 해주십니다. 칭찬 한마디에 더위는 싹 가셔버리고 시원한 오이냉국이 기다려집니다.

오이냉국을 만드는 데 요즘처럼 홍고추를 썰어 넣고 설탕물을 넣는 것은 아닙니다. 찬물에 오이를 채 썰어 넣고, 소금으로 대충 간을 맞추고 식초를 살짝 뿌리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오이냉국에 보리밥을 말아서 한 수저 듬뿍 떠서 입에 넣고 된장을 젓가락 끝으로 찍어 먹으면 꿀맛이 따로 없습니다.

시장이 반찬이고, 사람의 입은 간사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날씨가 한여름 못지않게 더운 날 문득 어렸을 때 먹던 오이냉국이 생각났습니다. 평소에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 직접 만들어서 먹어봤습니다. 일단 하우스에서 재배를 한 오이라서 오이 향이 나지 않았습니다. 오이 향이 안 나니까 국물도 식초 냄새만 강하게 날 뿐 별다른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음식물 쓰레기 배출량은 전체 음식물의 7분의 1가량이고, 1냔에 버려지는 음식물로 25조 원가량이 낭비된다고 합니다. 똑같은 식재료를 사용해도 예전의 오이냉국 맛이 나지 않는 이유는 먹는 음식보다 버려지는 음식이 더 많은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조용히 반문해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