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성유전’ 이야기 [방재욱]


‘후성유전’ 이야기 [방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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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성유전’ 이야기

2018.05.18

우리 몸을 이루는 60조 개 이상의 세포들의 핵 안에는 DNA(유전자)를 간직한 염색체가 46개씩 들어 있습니다. 이 46개의 염색체는 감수분열을 통해 만들어지는 정자와 난자를 통해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각각 23개씩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의 모습이나 성격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염색체에는 4가지 염기인 아데닌(A), 시토신(C), 구아닌(G), 티민(T)으로 이루어진 사다리가 꼬인 모양의 이중나선(二重螺線) DNA가 히스톤이라는 단백질에 목걸이처럼 감겨 있습니다. 세포 하나에 들어있는 DNA 분자의 길이는 1.8m나 됩니다.

유전자를 간직하고 있는 DNA는 각본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같은 각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연극이나 영화가 연출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생명 현상을 연출하는 유전자의 발현도 환경의 영향에 의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유전자를 간직하고 있는 DNA의 염기순서에 따른 유전자 발현의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가 유전학(Genetics)입니다. 최근 DNA를 이루고 있는 염기서열이 변하지 않아도 유전자 발현에 변화가 나타날 수 있음이 밝혀지며, 유전자의 발현을 통해 나타나는 생명현상이 유전자(DNA)만으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다른 원인들에 의해 유전자 발현이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후성유전(後成遺傳)’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이를 연구하는 분야가 후성유전학(Epigenetics)입니다. 후성유전학을 지칭하는 ‘Epigenetics’는 유전학의 영문명인 ‘Genetics’에 유전자 발현이 유전자 자체가 아닌 다른 원인들에 의해 나타난다는 주변 의미를 지닌 접두사 ‘Epi-’를 붙여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후성유전은 유전정보가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특정 유전자가 발현되어야 할 때 스위치가 꺼지거나, 발현되지 않아야 할 때 스위치가 켜져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은 유전자인 DNA에 메틸기가 달라붙는 DNA 메틸화나 DNA가 감겨 있는 히스톤 단백질에 변화가 생기는 히스톤 변형에 의해 나타납니다. 부모로부터 정상적인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환경의 영향으로 DNA 메틸화나 히스톤 변형이 일어날 경우 발현되어야 할 유전자가 발현되지 못하거나 발현되어서는 안 될 유전자가 발현되면 신체상에 문제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 실례로 산모가 임신 중에 입덧으로 영양섭취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태아에게 그 영향이 전달되어 영양 부족을 느껴 많이 먹음으로써 살이 찌는 체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유전적인 변이는 없지만 태아 시절에 겪은 제한적 영양 공급을 최대한 활용하는 후성유전적 프로그램이 작동하여 비만아로 자랄 확률이 높아지게 됩니다.

동일한 염기서열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면 어른이 되어 서로 다른 형질을 보일 수 있는데, 그 원인으로 후성형질이 꼽히고 있습니다. 이는 생활습관이 염기서열을 바꿀 수는 없지만 메틸화 패턴은 바꿀 수 있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후성유전의 원인들로 식생활 습관, 화학 물질이나 오염 물질, 자외선 등 다양한 요인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실례로 최근 식생활 습관이 후성유전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식습관이 손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수컷 쥐에게 고지방 먹이를 과도하게 섭취시켜 과체중 상태로 만든 다음 정상 체중의 암컷과 짝짓기를 시키면 태어난 새끼들에서 후성유전으로 당뇨병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최근 유전병과 후성유전의 상호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후성유전학이 치료약 개발이나 삶의 질 개선에 중요한 연구 분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대장암 세포에서 DNA 메틸화에 의해 후성유전적으로 조절되는 유전자가 발견되어 대장암 환자에게서 암의 재발 예후를 측정할 수 있는 바이오마커로 이용될 수 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후성유전으로 유전자 발현에 이상이 생기면 당뇨, 암, 심혈관계 질환, 정신분열증 또는 치매 등 다양한 질병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생활습관이나 다른 환경 요인들에 의한 후성유전으로 우리 삶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형질이 후손에 전해지지 않도록 좋은 생활 습관 길들이기에 관심을 가져보세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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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재욱

양정고. 서울대 생물교육과 졸. 한국생물과학협회, 한국유전학회, 한국약용작물학회 회장 역임. 현재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과총 대전지역연합회 부회장. 대표 저서 : 수필집 ‘나와 그 사람 이야기’, ‘생명너머 삶의 이야기’, ‘생명의 이해’ 등. bangjw@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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