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따돌린 세계보건기구(WHO) [허영섭]



대만 따돌린 세계보건기구(WHO) [허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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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따돌린 세계보건기구(WHO)

2018.05.15

내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세계보건총회(WHA) 연차회의에 대만이 올해도 초대받지 못했다. 정식 회원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도 참가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재작년에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는 유별난 조건과 함께 초청장이 도착함으로써 대만 사회의 여론이 들끓었으나 지난해부터는 아예 초청장 자체가 끊어져 버렸다. WHA가 세계보건기구(WHO)의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건강·보건·위생관련 현안 문제를 떠나 정치적 편견을 드러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러한 조치의 배경에 중국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전임 마잉지우(馬英九) 총통 당시인 2009년부터 WHA 참가를 허용 받았다가 현 차이잉원(蔡英文) 정부가 들어선 2016년부터 홀대가 시작됐다는 점에서도 유추가 충분히 가능하다. 차이 총통의 민진당 정부가 과거 국민당 때와는 달리 대만의 분리 독립을 추구하기 때문에 견제가 다시 시작됐다는 얘기다. WHO가 굳이 대만 독립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의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데서도 짐작되는 사실이다.

대만으로서는 최근 도미니카공화국이 수교 대열에서 벗어나 중국 쪽으로 편입됐다는 점에서도 국제무대에서 위기를 느끼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19개의 다른 수교국 가운데서도 여차하면 조만간 등을 돌리고 떠날 가능성이 큰 나라들도 거의 공개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중남미의 아이티와 온두라스,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등이 거기에 포함된다. 유럽 마지막 교두보인 바티칸과의 단교 가능성이 임박한 상황에서 WHA의 참가 거절이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지 않아도 대만에 대한 중국의 압박은 노골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요르단 수도인 암만에서 열린 문화행사에 참가한 대만 부스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강제로 철거돼 짓밟혔는가 하면 호주 퀸즈랜드에서도 대만 학생이 그린 청천백일기 문양의 그림이 우수작 표창을 받고도 다시 덧칠을 당하는 사례가 벌어졌다. 나이지리아 주재 대만 대표부가 수도인 아부자에서 라고스로 이전을 강요받았으며, 그 명칭에서 ‘중화민국’이라는 표현을 삭제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절박한 사정인 만큼 대만 정부가 WHA 참가신청 마지막 순간까지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보여줬던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 초청장을 받지 못했는데도 천스쭝(陳時中) 보건위생부장(장관)을 필두로 하는 대표단이 제네바에 파견돼 각국 대표단과 접촉을 가진 것이 하나의 사례다. 하지만 이만한 정도로 WHO의 입장을 되돌리기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과 캐나다, 일본, 유럽연합(EU) 등이 개별적으로 대만의 WHA 참가를 적극 지원해 왔는데도 중국의 완강한 장벽은 꿈쩍도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번 WHA에서 특별히 정치적 의제를 다루도록 돼있는 것도 아니다. 이사회에서 상정한 보건관련 문제들을 논의하고 의료지원 활동과 그에 따른 예산 승인을 하는 것이 전부다. 최근 아프리카에서 집단 감염이 확인된 에볼라 바이러스의 확산 방지책과 미얀마 국경을 벗어나 방글라데시에 정착한 로힝야 난민들의 장마철 전염병 예방 대책이 의제에 포함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때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확산됐던 소아마비 바이러스 근절책도 논의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영향력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물론 WHO가 유엔 산하기구이므로 WHA도 그 회원국 위주로 운영된다는 규정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WHO가 대만 정부에 대해 옵서버 참가 조건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과 함께 ‘유엔결의안 2758호’를 수용하도록 요구하는 배경이 바로 거기에 있다. 1971년 10월 25일 유엔이 중화민국을 안보리 상임이사국에서 축출하고 그 자리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중화 유일의 합법적인 대표’로서 대체한 결의안이 그것이다. 중화민국이 정식 회원국으로 참여하던 WHO에서 그 이듬해 쫓겨난 것도 이 결의안에 의해서였다. 현재 대만이 활동 범위를 넓히려고 노력하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나 인터폴(Interpol)에서도 이러한 논리는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건강 문제는 지구촌 보편적인 관심사로서 국경이나 인종, 이념, 종교 등으로 인해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는 분야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급성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으며 거기에 공동 대처하는 주체로서 WHO가 설립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 WHA의 결정은 대만의 수모라는 차원을 넘어 WHO의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수모를 느껴야 하는 것은 오히려 WHO 쪽이다. 인류 건강증진에 이바지한다는 원래 취지를 벗어나 중국에 볼모 잡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WHO 사무총장인 테드로스 게브레예수스가 WHO 홈페이지에 언급한 내용도 공허할 뿐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신분과 거주지에 관계없이 건강하고 생산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세상을 꿈꾼다.” 여기에 ‘대만 사람들은 제외하고’라는 표현을 추가하는 게 온당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정치적 코드가 맞지 않는다면 보건·위생 분야에서도 따돌림 당할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WHO의 기본 정신이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걱정하게 된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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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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