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끝에 의 상하는 정치 [임철순]


음식 끝에 의 상하는 정치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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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끝에 의 상하는 정치

2018.05.04

정상회담은 만나서 음식 이야기하는 거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독설가로 유명한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가 한 말 같은데, 그가 살았던 시대와 정상회담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데다 어디서 그런 말을 했는지 전고(典故)도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하여간 음식은 개인의 생명활동과 도락, 행복을 위해서든 외교활동에서든 중요한 매재(媒材)인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은 유식한 척 여러 문자를 동원해서 음식과 정치문제를 따져보려 합니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는 한반도 각지의 특산 재료와 음식이 대화와 소통을 촉진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특히 평양냉면은 그 슴슴하고 심심하고 잔잔하고 밍밍한 맛으로 만찬 참석자들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국내외 동포들과 외국인들까지 맛보고 싶게 했습니다. 북에서는 슴슴하다, 남에서는 심심하다고 말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북에서는 무슴슴하다는 말도 쓴다지요?

그런데 잔치가 흥성하게 벌어져 다들 맛있게 먹는데 초청받을 법한 사람들이 멀리서 구경만 하게 됐다면 기분 좋을 리 있겠습니까? 음식은 원래 나누어 먹는 것이지만 “음식 끝에 정 난다”는 긍정적인 경우는 적습니다. 오히려 “음식 끝에 의 상한다”는 말이 더 현실적으로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만찬에 정치인들 중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우원식 원내대표,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만 초대를 받았습니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가 회담을 자꾸 평가절하하고, 김문수 서울시장 후보가 “(회담 결과가) 반찬만 먹고 밥은 안 먹은 기분”이라고 말한 것도 소외감에서 나온 말로 들립니다. 박주선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는 “특정 정당 대표만 초청해 만찬하는 모습을 보면서 문 대통령이 협치구도를 파괴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며 “맛있는 음식을 못 얻어먹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생각과 사고가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섭섭하겠지요. 그렇더라도 점잖게 한마디 하고 말 것이지 큰집 잔치에 작은집 돼지가 죽은 것도 아닌데 왜 연일 ‘말의 성찬’이니 ‘외눈박이 외교니’ 하며 시비를 걸고 몽니를 부리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럴수록 일반적인 국민정서와 동떨어져 지지를 잃을 뿐인데 말입니다. 홍 대표의 이런 언동에 대해 “학교 안 가겠다고 떼쓰는 애를 어르고 달래서 등교시켰더니 당장 90점 이상 못 받으면 그만두라는 꼴”이라고 비꼰 사람이 있습니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성”[食色性也]이라고 했던 맹자는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음식을 밝히는 이를 사람들은 천하게 여긴다. 작은 것을 기르느라 큰 것을 잃기 때문이다.”[飮食之人 則人賤之矣 爲其養小以失大也] 여기에서 말하는 게 음식 자체만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구복(口腹)에 얽매여 심지(心志)를 잃어서는 안 되니 대절(大節)과 대체(大體)를 놓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맹자는 “물고기도 곰발바닥도 다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둘 다 얻기 어렵다면 곰발바닥을 취하겠다”고 하면서도 삶과 의(義)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고 한 사람입니다.

일본 속담에 “사랑의 원한과 음식의 원한은 엄청나다”는 게 있습니다. 이것도 먹는 음식만을 말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음식 때문에 서럽거나 섭섭한 사람, 원망 원한을 품는 사람이 생기면 그 잔치는 의미가 작아집니다. 그런 점에서 살펴보면 이번 만찬은 남북간 소통과 화합을 지향하면서 남한 내부에는 차별과 배제의 메시지를 던진 행사였습니다.

식탁에 오른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 쌀로 지은 밥,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 신안 가거도의 민어와 해삼초를 이용한 ‘민어해삼편수’,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의 서산목장 한우로 만든 ‘숯불구이’, 문 대통령의 고향 부산의 대표적 생선 ‘달고기 요리’, 작곡가 윤이상의 고향인 통영의 '문어냉채' 등입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해 애쓴 분들의 고향과 일터에서 가져온 먹거리들”입니다. 외국 언론들은 이를 ‘음식외교학의 일부’라거나 ‘통일메뉴’라고 평했습니다.

후식으로 오른 백두대간 송이꿀차와 제주한라봉, 평안도 문배술과 당진 두견주의 어울림은 무난하고 통일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 요리에서 세 명의 전·현직 대통령과, 이장 문제로 갈등이 심했던 작곡가의 고향만 챙긴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욱이 김정은이 잘 먹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스위스식 감자전 뢰스티까지 챙겼지요. 대통령들이 명절 때 팔도의 특산물을 모아 각계인사들에게 선물하던 것처럼 각지의 먹거리를 담담하게 고루 안배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개 잡아먹고 동네 인심 잃고, 닭 잡아먹고 이웃 인심 잃는다”는 게 있는데, 색다른 음식을 나누어 먹기란 원래 그렇게 어렵습니다.

이번 정상회담을 보면 회담장 테이블의 크기나 벽에 건 그림, 훈민정음을 재해석한 작품, 디저트 등 상징과 의미기호가 곳곳에 넘칩니다. 이런 걸 잘도 연구해내고 개발하고 착안했구나 싶을 정도입니다. 사물의 의미를 읽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놀랍습니다. 그런 놀라운 능력을 음식만이 아니라 사람을 읽고 정치판을 읽는 데 발휘하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특히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당 대표들도 초청하면 좋지 않았겠습니까? 중국 사람들은 음식을 권할 때 ‘熟不還生(숙불환생)’이라는 말을 쓴다고 합니다. 이미 익힌 음식은 날것으로 되돌아갈 수 없으니 이왕 이렇게 많이 만든 것 함께 먹자는, 겸손한 권유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거부하고 오지 않으면 스스로 협량(狹量)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며 앞으로 정국을 주도하거나 운용하는 일에서도 뒤처질 게 뻔합니다.

“현자는 사상을, 착한 자는 세상사를, 속인은 자기가 먹은 걸 화제로 삼는다”고 합니다. 이건 몽골의 속담입니다. 화제로 삼든 논란을 계속하든 지나친 음식 이야기는 꼴불견입니다. 여든 야든 좀 더 아량 도량 국량 역량이 있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집권층은 모든 문제와 사람의 일에서 ‘治大國 若烹小鮮(치대국 약팽소선)’의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삶듯 하라는 것은 자꾸 휘젓거나 건드리지 말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담박하고 슴슴해서 거의 아무 맛도 없는 것 같은 음식, 그런 음식을 고루 나누어 먹는 정치를 집권 여당부터 잘해야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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