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보내는 신호 [신현덕]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보내는 신호 [신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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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보내는 신호

2018.05.02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끝났습니다. 전 세계 언론이 판문점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봤습니다. 1953년 정전협정문서에 서명하던 날도 이것보다는 덜했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경계선(판문점)에서 이렇게 많은 언론인들이 취재 경쟁을 벌인 것은 전례 없습니다. 아마도 정전협정문에 서명한 장소이며, 전쟁과 평화를 버릇처럼 수없이 뇐 역사의 현장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두 정상은 군사분계선을 남북으로 서로 넘나들며 이벤트를 연출했고, 세계 주요 언론은 이를 예사롭지 않게 다뤘습니다. 현장 중계를 지켜보던 내외신 기자들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을 tv에서 들었습니다.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적했던 두 지역의 정상이 손을 맞잡고 마주 웃는 데 대한 어색함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북쪽 손님을 최초로 맞이한 우리나라 민간인은 대성동 '자유의 마을' 어린이들입니다. 이들은 각각 두 정상에게 꽃다발을 주며 환영했고, 정상과 함께 사진도 찍었습니다. 외국 매체들은 어린이들에게 초점을 맞췄고, 비무장지대 안쪽에 산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독일 언론들이 의미를 더하며, 달리 해석했습니다. 한 신문은 “전 세계가 판문점 회담장을 지켜본다.”고 보도했습니다. 독일 통일에 기여했던 서베를린을 보라는 듯이 이 제목을 뽑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주의 깊게 보자는 의미였을 터이고, 회담 이후에는 합의된 것들이 어떻게 이행되는지를 모두가 지켜보라는 당부였습니다.

이 보도는 1993년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가 외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자유의 마을을 방문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때는 독일 통일 이후 ‘다음 차례는 한국’이라고 세계의 이목이 모아지던 때였습니다.

콜 총리가 우리 국민도 방문하기 어려운 이 마을을 찾은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국제법과 조약상 독일 통일 전 서베를린과 지위에서 유사한 지역입니다. 통일 전 서베를린의 모든 행정기관은 서독 정부 지침을 따랐습니다. 일반인들이 일하며, 살아가기에는 전혀 차이가 없었습니다. 지방정부도 있었고, 연방 의원도 선출했으며 서독 화폐와 여권 등을 사용했습니다. 서베를린 출신 의원들은 서독 연방의회에 출석, 발언만 가능했고 가장 중요한 의결권이 없었습니다. ‘옵서버’였습니다.

실제로 자유의 마을도 한국 정부가 관리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만,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군이 관장하는 행정단위입니다. 정전 초기 이곳에는 독자적인 입법 사법 행정 기구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능을 유지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모든 것을 우리나라에 위탁했습니다.(졸저 「독일은 서독보다 더 크다」) 마을의 지위를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주민들은 우리나라에서 물건을 사면서 면세 혜택을 받고, 군 징집도 면제받습니다.

서베를린은, 잘 알려진 것처럼, 동독 주민을 상대로 한 최고의 선전장이었습니다. 장벽 너머로 자유가 무엇인지를 매일 보여주었습니다. 풍선과 확성기가 없어도 됐습니다. 이에 반해 서베를린 시민이 겪은 고통도 많았습니다. 독일인들이 가장 자랑하는 아우토반의 무제한 질주 욕망을 접고 살았고, 식료품을 장기 보관해야 하는 불편을 참아냈습니다. 서독에는 서베를린에 장기 보관했던 식료품을 값싸게 공급하던 전문 유통업체까지 있었습니다. 소련이 서베를린 통행을 막아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습니다. 미국과 서독을 포함한 서방 진영은 하늘로 통행(공중가교 Luftbrücke)을 이어 갔습니다.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서베를린에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고 한 말은 지금도 회자됩니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아주 작지만 서베를린과 동일한 역할을 했고, 똑같은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 지금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자유 여행과 거주의 자유, 혼인의 자유 등에서 일부를 제한받고 있습니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지금은 변방이지만, 중심이 되어 한반도의 자유 민주 평화 통일을 이루는 창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어 이곳에서 열릴 수도 있는 미·북 정상회담을 지켜보는 이유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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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현덕

서울대학교, 서독 Georg-August-Universitaet,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몽골 국립아카데미에서 수업. 몽골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 방어. 국민일보 국제문제대기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교수, 경인방송 사장 역임. 현재는 국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독은 독일보다 더 크다, 아내를 빌려 주는 나라, 몽골 풍속기, 몽골, 가장 간편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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