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1년? [김영환]


잃어버린 11년?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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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1년?

2018.04.30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최근 “이번 북남 수뇌 상봉과 회담은 민족적 사변”이라고 썼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회담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11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수시로 만나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11년’, 남북 관계가 왜 막혔는지는, 햇볕 정책이 어떻게 배신당했고 핵 개발의 도우미가 되었는지, 민족 동질성을 저버리고 대남 도발을 했던 북한 정권의 자성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핵과 미사일 완성의 자신감인지 모르지만 "미사일 발사로 새벽에 깨울 일은 없다"는 식으로 농담처럼 넘어갈 사안이 아닙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최근 “비핵화의 의미는 간단하다. 북한이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확언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번 판문점 선언에서 ‘북핵 문제’에 대한 언급은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 남과 북은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의 있고 중대한 조치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앞으로 각기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했다. 남과 북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라는 것뿐입니다. 오히려 북의 핵 폐기 일정은 없이 남한이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 것으로 연루되었습니다.

만나서 전쟁을 하지 말자, 평화 체제를 만들자는 것은 일단 환영할 일입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도발을 자행해 숱한 합의를 휴지로 만든 것은 늘 북한이었습니다. 4·27 판문점 선언 하나로 김정은이 하루아침에 평화의 상징이 될 수는 없죠. 남북한 문제에 거의 문외한일 수천 명의 외국 특파 기자들은 ‘김정은, 세계 무대 등장’이라는 화려한 연기와 ‘이제 전쟁은 없다’는 수사에 취해 열심히 기사를 쓰겠죠. 이것이 혹시 북이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으면 강제로 하겠다는 트럼프의 옵션을 우습게 만들어버리려는 남북의 공동 기획 같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이렇게 평화로운데 공격할래?' 라고요. 

선언에서 핵심이어야 할 북핵 폐기는 CVID(완벽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절차)를 담기는커녕 '민족끼리'라는 감상적 언어로 남북관계 개선, 경제협력 뒤로 밀려나 '한반도 비핵화'로 둔갑했습니다. 섣부른 남북 경협은 유엔 등의 대북 제재와 직결되고 북한 비핵화와 궤를 같이 해야 한다는 국제적 입장에 반하는 것이죠. 이번 선언은 핵 폐기와 사찰, 기존 무기의 불능화를 담은 과거의 합의문보다 현저히 후퇴한 것이라고 비판받습니다. 

문재인과 김정은 두 사람은 최대의 국제 현안인 북핵 폐기에 대한 실천 방안 없이 연내의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 전환을 내걸었습니다. 중국과 북한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북핵 폐기를 미국의 한국 핵우산 보장, 전략자산 배치 철회와 연계하고, 소위 살라미 전략으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며 궁극적으로 평화협정 체결과 한미동맹 파기, 주한미군 철수를 목표로 삼는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북한 독재체제가 종식되기 전까지 주한미군은 동북아의 균형자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해양의 전략적 가치가 한국보다 더 중요한 타이완으로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를 옮겨오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번 회담에서 북한 인권 문제의 거론을 바랐지만 무위였습니다. 건강한 미국의 대학생 오토 웜비어 군은 2016년 말 관광객으로 평양에 들어갔다가 17개월 뒤 억류에서 풀려난 지 6일 만에 숨졌습니다. 그의 부모는 고문으로 죽였다며 남북 정상회담 바로 전날 북한을 상대로 워싱턴 DC 연방지법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미 상·하원 의원들은 최근 북한에 모든 정치범 수용소 폐쇄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냈습니다. 정치범 석방도 요구했습니다. 일본 신문들은 아베 총리가 문 대통령에게 남북 정상회담에서 일본인 납치자 석방 문제를 거론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트럼프와 아베는 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에게 핵·생물·화학 무기와 모든 탄도 미사일의 포기를 요구할 것을 확인했습니다. 핵과 미사일 도발로 국제적 제재를 받고 궁지에 몰려 '미소 외교'로 대화에 나선 절박한 북한에 대해 판문점 선언은 북한의 ‘아군’처럼 내주기만 했다고 비판받습니다. 

남한은 핵무기가 없지만 자유민주 체제로써 북을 능가합니다. 선언에서 남한은 적대행위 중지로 대북 확성기 방송과 대북 전단 살포 중지를 반대급부 없이 약속했습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북한이 DMZ에 설치한 목함 지뢰로 아군이 공격받아 재개한 것이죠. 민간인인 탈북자와 국제 인권단체가 주도하는 대북 전단 살포는 ‘남한은 자유민주체제로 이렇게 잘살고 있다. 우릴 보고 배워 주민을 존중하고 잘사는 사회를 만들라’는 식으로 민간인들이 알려주는 것인데 왜 적대 행위인가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입니다. 집권자에게는 적대 행위일지 모르지만 압제와 정보 폐쇄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길을 일깨우는 좋은 일입니다. 

시급한 것은 개성공단을 의식한 연락사무소나 경의선 연장, 금강산 관광을 도와줄 동해안 도로 건설이 아니라 남북한 주민의 자유로운 소통 길입니다. 하기야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도 네이버의 댓글을 악용하여 여론 조작을 도모한 드루킹 같은 민주당 당원들이 있긴 하지만 민족의 동질성을 위해 북한 주민들에게 폐쇄된 인터넷 망을 열어 남한 매체의 구독과 청취를 허용하도록 촉구했어야 했습니다. 현상 고착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이 자유로운 삶을 택하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의무이고 헌법이 명시한 자유민주주의의 통일 원리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담대한 남북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정치는 최소한 개입하고 울고불고하는 이산가족 상봉 이벤트가 아니라 상호 가족 방문, 서신 교환, 전화 혹은 핸드폰 통화, 인터넷 접근 허용 등 디지털 시대의 문명을 북한 주민들도 이용하도록 해야죠. 이것이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돕는 것입니다. 

개성공단은 4차 핵실험에 대한 대북 압박의 국제공조로 폐쇄되었고 금강산 관광은 새벽길에 산책 나온 주부 관광객 박왕자 씨를 북한 초병이 쏴 죽였기 때문에 중단됐습니다. 김정은이 연평도 포격을 슬쩍 언급한 것을 잃어버린 11년의 반성으로 생각한다면 너무 가볍지 않나요? 서해안 NLL 공동 어로 선언을 보면 인천공항 등 수도권에 대한 위험성과 함께 이 수역을 수호하던 천안함의 폭침이 생각납니다. 북한 도발로 순국한 장병들의 유족과 국가 안보를 맡은 국군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관계의 정상화는 과거를 불문에 부치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6·25 남침도 그렇죠. 우리가 곳곳에 소녀상을 세우며 군대위안부 문제로 얼마나 집요하게 일본에게 반성을 요구하고 있나요?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중요한 것을 남겨 놓았을까요? 트럼프는 회담이 열려도 곧 자리를 뜰 수도 있고 아예 성사될지 않을 수도 있다고 공언해왔지만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북한이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목표를 표명한 것은 고무적이다. 우리는 북한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펜스 미 부통령은 "단 한 걸음 전진했다. 대북 압박과 제재는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최우선은 북핵 해결입니다. 한국은 국가 안보의 핵심 축인 동맹국 미국과 엇박자로 나갈 수 없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너무나 큰 짐을 지고 북한 봐주기에 급급해 국가의 미래에 대한 출중한 전략도, 국제 공조도 소홀히 한 채 북핵 문제를 남의 일처럼 넘기며 버거워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번 선언은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과 국내외 여론, 국회의 토론으로 철저하게 검증될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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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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