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등대]200년 걸쳐 진화한 스미튼 에디스톤 등대 VIDEO: Smeaton's Eddystone Lighthouse


[세계의 등대]

200년 걸쳐 진화한 스미튼 에디스톤 등대(Smeaton's Eddystone Lighthouse)

주강현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세계 최초 근대 등대

시멘트 건축 이정표로 우뚝

'존 스미턴'이 만들어

플리머스 데본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등 3군데에 있어

영국 선진 기술력 발휘


마침내 근대 등대 에디스톤이 탄생하다 

첨단 건축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도 시멘트는 여전히 중요하다. 시멘트는 너무도 흔해 그 가치를 잊는 경우가 많으나, 출현 당시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기술사적 사변이었다. 본디 로마 시대에도 시멘트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일명 포틀랜드시멘트라 부르는, 물과 결합하는 본격적 수성 시멘트는 등대에서 실험되고 입증되어 진화해나갔다. 그 획기적인 실험이 영국 남부 플리머스에서 있었다.


런던 서남쪽 플리머스에 우뚝 서있는 에디스턴 육상 등대(스미튼스 타워)는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의 해양력을 상징한다. 시멘트가 쓰이는 등 첨단 건축 기술이 활용된 세계 최초의 근대 등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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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머스는 런던에서 서남쪽으로 약 310㎞ 떨어진 데본주의 남쪽에 자리한 해안도시다. 플리머스의 역사는 영국 해양사의 축약본이라고 할 수 있다. 군인이자 항해가인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1581년 이곳의 시장이 됐고, 1593년에는 의회 의원이 됐다. 그의 흔적은 호(Hoe) 언덕 위에 세워진 동상과 플리머스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드레이크 서커스’에 남아 있다. 또한 이곳은 대서양 노예무역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존 호킨스 같은 성공한 해상무역업자(사실은 반문명적 노예제도의 주범)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1620년 청교도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를 떠나 신세계로 향했으며, 아메리카에 플리머스 식민지를 세웠다. 당시 이 배의 승객은 102명, 승무원은 25~30명이었다. 약 66일간의 힘든 항해 후 코드 곶 프로빈스타운 항구에 닻을 내렸다. 플리머스의 옛 부두에 가면 17세기 청교도가 미국으로 떠났던 그 자리에 세운 기념문과 성조기 및 유니언잭이 동시에 게양된 것을 볼 수 있다. 




플리머스는 산업혁명기에 상업 선적 항구로 성장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산물을 수입하고 광물을 수출했으며, 승객을 운송했다. 그런 이 도시의 상징이 에디스톤 등대(Eddystone Lighthouse)다. 시내 골목길이나 카페, 간판, 팸플릿 등 어디를 가도 이 등대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가공할 정도로 세계 등대사에 족적을 남긴 에디스톤 등대는 약 200년 동안 네 번에 걸쳐 조성됐다. 그래서 그 자체로 등대사의 증언자이자 세계 등대의 아이콘이다. 시대를 달리하는 다양한 건축가가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이 등대를 ‘실험’했으며, 세월이 흘러 마침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 등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가 무심결에 보고 스쳐지나가는 등대의 원형이 바로 플리머스의 에디스톤 등대인 것이다. 해양제국 영국의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당대 최고의 해양력을 갖추고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의 선진 기술력이 발휘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플리머스 해상 에디스톤 등대 우측이 원래 등대의 기초/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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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에 걸친 실험과 도전 끝에 

등대는 레임헤드에서 14㎞ 떨어진 위험한 에디스톤 암초 위에 서 있다. 에디스톤 암초는 플리머스만과 리저드곶, 콘월 중간 지점에 펼쳐진 19㎞ 길이의 광대한 바위다. 암초 대부분은 물에 잠기고 만조 때는 수면 위로 약 90㎝밖에 보이지 않는다. 중세에 무역상인은 이런 암초를 두려워하여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가까운 해협으로 우회하여 재난을 피하고자 했다.


오늘날 플리머스 시내 호 언덕에는 에디스톤의 제4기 등대가 남아 있다. 호는 플리머스의 정신적 고향과도 같은 언덕이다. 배가 떠나고 들어올 때 이곳에 올라 기뻐하기도 하고 눈물짓기도 하던 언덕. 푸른 잔디로 뒤덮인 언덕에는 드레이크의 동상을 비롯해 전몰기념비, 전승기념비 등 전쟁 유산이 자리한다. 


계단은 모두 화강암을 깎아서 정밀하게 연결했다. 콘크리트나 철제 구조물이 아닌 화강암을 돌끼리 서로 아귀가 잘 맞도록 일일이 잘라내는 과정을 거쳤을 테니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등대의 층마다 목재 의자와 장을 두었는데, 고급 목재가 풍기는 품격 넘치는 색조가 빅토리아 시대의 위엄을 전해준다. 


스미튼 암초 위에 세워진 스미튼 타워/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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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아 있는 호 언덕의 에디스톤 제4기 등대는 마지막 생존자일 뿐이다. 무려 200년 동안 여러 번에 걸쳐 실험하고 도전한 끝에 근대 등대가 탄생했다. 여기서 만들어진 등대가 전 세계로 확산됐으며, 한국의 등대도 이 영향에서 예외가 아니다. 총칭인 에디스톤 등대 외에 각 시기별로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인 등대 이름을 갖고 있다. 


팔각형 목조 구조의 윈스탠리 등대(1698~1703)가 제1기다. 세계 최초의 근대 등대다. 헨리 윈스탠리는 나무로 다각형의 탑 형태를 건축했다. 등대는 첫 겨울을 견뎌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수리가 필요했다. 1703년 11월 몰아닥친 대폭풍우로 등대가 파손됐기 때문이다. 스탠리는 폭풍 당시 등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화재가 나서 등대지기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어지는 러디어드 등대(1708~1755)는 런던의 비단과 모피를 파는 상인 존 러디어드가 설계를 의뢰해 지은 것이다. 러디어드는 목재 구조를 채택하고 벽돌과 콘크리트의 핵심 주위에 원추형 나무 구조로 이루어진 새로운 등대 설계를 의뢰했다. 50여년 동안 버틴 제2기다.




제3기인 스미턴 타워(1759~1882)는 등대 설계에 미치는 영향과 새로운 건축용 콘크리트 소재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존 스미턴은 산업혁명 시대의 ‘시민 엔지니어’로 불린 독특한 공학자다. 일명 스미턴 타워로 불리는 이 등대는 구조 설계 면에서 크게 진보했다. 스미턴 타워는 등대 디자인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 건축사에서도 의미가 있다. 등대 하부를 바닷물 속에서도 잘 굳는 콘크리트를 사용해 지었는데, 당시로서는 건축사상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콘크리트를 도입한 스미턴 타워는 등대 건설, 아니 전체 건축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다리 공사의 교각 건설, 항만 건설 등 물과 접촉하는 특수한 공사에 콘크리트를 도입함으로써 가공할 기술력을 발휘했다. 스미턴 타워는 그런 점에서 당대의 선진기술력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더글러스 등대(1882~현재)가 제4기. 런던 바우강에 위치한 트리니티 하우스의 설계자인 제임스 더글러스는 스미턴 타워의 해체와 제거를 감독했다. 그리고 스미턴의 기술을 더욱 개발해 3년 만에 이곳 언덕에 등대를 재축조했다. 1982년에 자동화된 등대는 플리머스의 최대 상징이자 관광명소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야심한 밤에 호 언덕을 찾아갔다. 흰색과 붉은색 띠의 강렬한 조화, 하부가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아지는 곡선의 미학 등 근대 초기 등대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1620년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떠났던 

플리머스 항구.


등롱은 귀족적 품격을 드러내며 빛나고 있다. 빅토리아풍의 세련된 곡선 지붕, 지붕 꼭대기의 황금색 방향키, 차분하게 가라앉은 회색빛 색조와 흰색 등탑의 어울림 등 근대 등대를 대표하는 등대로서 품격을 잃지 않는다. 기술사뿐만 아니라 건축미학적 선도성까지 보여준다. 등롱으로 올라서면 호 언덕 자체가 높기 때문에 플리머스 해안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현재 남아있는 더글러스 등대의 빅토리안시대풍 등롱.



등대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리버풀에 들렀다. 리버풀은 산업혁명 시대에 런던 다음가는 큰 항만이었다. 1764년 연간 141척의 배가 리버풀에서 아메리카로 떠났다. 원자재 수입과 공산품 수출은 물론이고, 대서양 노예무역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앨버트 독, 퀸 독 등 여러 개의 독으로 이루어진 리버풀 항구에는 해양박물관과 국제노예박물관이 있어 이곳이 노예무역의 세계적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국 해양 분야의 침체와 더불어 리버풀도 과거의 영예를 많이 잃었다.


한때 세계적인 항구 도시였던 리버풀의 흔적은 다양한 인구, 문화, 종교 커뮤니티에서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아프리카 흑인 공동체도 있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도 있다. 해변에는 길을 걷는 비틀스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어 리버풀이 ‘비틀스의 도시’이기도 함을 알려준다.


리버풀을 하나의 등대 표본조사 지역으로 설정한 것은 이곳에서 바다와 강과 수로를 지키는 성격이 다른 세 개의 등대를 통시적으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설 등대가 널리 확산된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개인이 소유한 등대가 생각 이상으로 보편적이었던 시대에 영국의 해양력도 세계 최고로 발전하고 있었다. 


강을 지키는 비드스톤힐(Bidston Hill) 등대부터 찾았다. 리버풀에서 버컨헤드까지는 전철로 30분이면 간다. 비드스톤힐은 100ac(에이커)에 달하는 삼림 지대이며, 위럴에서 가장 높은 해발 70m에 있다. 등대는 1771년 이후 쭉 비드스톤에 있었다. 개인 등대다. 이처럼 영국에는 당대에 개인 소유의 사설 등대가 확산됐다. 등대 출입문에 ‘1873-머지 독 에스테이트(Mersey Dock Estate)’라고 각인돼 있다. 전형적인 강의 등대다. 


리버풀 센트럴역에서 뉴브라이턴역까지 30분이면 뉴브라이턴(New Brighton) 등대가 있는 만에 당도한다. 모래톱이 북쪽으로 튀어나와 작은 반도를 형성한 끝자락에 등대가 서 있다.


예전에는 불빛이 전혀 없어서 만 어귀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배가 이곳 모래톱에 부딪쳐 좌초하기 십상이었다. 나폴레옹 시대에 축조된 자그마한 퍼치성이 바다에 떠 있다. 밀물에는 성 일부가 바다에 잠겨 최적의 방어 조건이 됐다. 등대는 대략 1683년 건설된 것으로 알려진다. 전형적인 만의 등대다. 


팔각형 목조 구조의 윈스탠리 등대 모습을 담은 그림.


리버풀 센트럴역에서 30분 거리인 버컨헤드역에서 환승하면 20분 만에 엘즈미어에 닿는다. 엘즈미어는 체셔에 있는 제법 큰 도시이자 항구다. 체스터와 머지강을 연결하는 수로의 도시다. 산업혁명 때는 철이나 석탄같이 무거운 원료를 저렴한 가격에 운반해야 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운하 건설은 필수적이었다. 엘즈미어에도 1795년 맨체스터 독과 머지강을 연결하는 운하가 건설된다. 




엘즈미어(Ellesmere) 등대는 현재 선박박물관 등이 몰려 있는 건축군에서 조금 떨어진 수로 옆에 단독으로 서 있다. 화강암을 정확히 잘라서 둥근 축대를 쌓았으며 평평한 대지 위에 적벽돌을 조적했다. 등롱은 종탑 모양의 구리철판으로 만들었다. 사설등대이자, 전형적인 수로의 등대다.


영국의 개인 등대를 보면 한국 대기업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항구 등 국가 기반시설의 혜택을 받는 것에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필요하면 개인이 등대를 만들고 관리했던 영국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필자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 문화사, 생활사, 생태학, 민속학, 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해양문명사가. <독도강치 멸종사> <환동해문명사> <적도의 침묵>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202102005&code=960100#csidxff144d8e86f8357b1a512e9659edf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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