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인생이 길지 않을 것이니 [신아연]


남은 인생이 길지 않을 것이니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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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인생이 길지 않을 것이니

2018.04.10

지난달 중순에 초등학교 동창생 딸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고등학교 친구의 아들이 결혼을 합니다. 좀 빨리 사위를 본 대학 동기는 외손녀가 벌써 두 살입니다. 지난달에 참석한 결혼식에서 혼주가 된 친구를 보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딸처럼 신랑 옆에 신부로 서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부모 자리로 바꿔 앉은 모습에서 세월의 빠름을 실감했습니다.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축가를 부르는 동안 식장 모니터에는 두 사람의 어린 시절과 친구의 모습 등 가족 영상이 흘렀습니다. 새댁인 친구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딸을 걸리다 보듬다하는 모습이 지나가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 대학생의 엄마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또 이렇게 짝을 지어 떠나보내게 된 것입니다.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가 모두 한순간의 일만 같고, 또한 꿈인 듯했습니다.

장자는 인간이 세상에 머무는 시간을 달리는 말이 벽의 틈 사이로 지나가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당시 벽이라야 진흙을 이겨 세운 것일테니, 풍화되어 갈라져 금이 간 사이로 걸어가는 말도 아닌, 달리며 지나가는 말을 보는 그 찰나 같은 순간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다가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처럼 짧디짧게 세상에 머무는 존재임에도 마치 생이 무한정 펼쳐져 있을 것처럼 느끼는 거지요.

요즘 제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나훈아의 ‘공(空)’입니다.

살다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잠시 왔다 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단 것을

살다보면 알게 돼, 알고 싶지 않아도
너나나나 모두 다 미련하다는 것을
살다보면 알게 돼, 알면 희미해져도
그런대로 살 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잠시 스쳐가는 청춘, 훌쩍 가버린 세월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보면 알게 돼, 비운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꿈이었단 것을

노랫말에 비춘다면 유난히 길었던 겨울도, 3월의 꽃샘추위도 지나고 나니 모두 살 만했다고 느껴집니다. 어차피 모두 어리석고 모두 바보 같고 모두 미련하다면 내가 살아 온 인생도 받아들일 만해집니다. 지금껏 아무리 어리석었고 아무리 바보 같았고 아무리 미련했다 한들 갈라진 벽 사이로 달리는 말이 지나가는 순간의 일이었을 뿐이니까요. 하기야 안 받아들이면 또 어쩌겠습니까. 이것이 내 인생인 것을요. 이 대목에서는 노랫말 그대로 웃음이 납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사는 일이 ‘만만하게’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물론 누구의 인생도 만만할 리가 없지만 매사에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고, 사는 일이 덜 두렵다는 의미를 수사적으로 말해 본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약간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제게 지인이 이런 위로를 했습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해도 결과가 좋게 나타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요. 그러니 일상에서 너무 마음 졸이지 말고 살아요. 남은 인생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니 마음 편히 살아요.”

지인의 말씀 중에 ‘남은 생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니’라는 말이 그렇게 와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살면서 그 무엇을 잃을까 전전긍긍, 노심초사, 좌불안석하다가 막상 그것을 잃었다 해도 그다지 큰일이 나지도 않을 뿐더러 잃고 나서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던 경험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잃음의 주체를 잃게 되는 궁극적 상실, 즉 죽음도 그와 같이 편안한 것이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을까요. 어쩌면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온이 죽음을 통해 비로소 찾아올지 모릅니다.

장자는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우화로 풀어냅니다. 장자가 길을 가다가 굴러다니는 해골을 만났습니다. 장자가 해골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삶의 욕망을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도리를 잃어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나라가 망해서 죽었거나 형벌에 처하여져 이렇게 된 것인가. 또는 좋지 못한 짓을 저지르고 부모나 처자 볼 면목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그것도 아니면 추위와 배고픔에 떨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저 수명이 다하여 죽은 것인가.”

그러자 해골이 대답합니다.

“그대가 말한 것은 모두 산 사람의 걱정거리일 뿐, 죽음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제왕의 즐거움도 죽은 자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박희채 저 <장자의 생명적 사유>에서

장자가 해골에게 "만약 생명을 관장하는 신에게 부탁하여 다시 한 번 살과 피를 주어 살아나게 해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해골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 지극한 행복을 버리고 인간의 괴로움을 다시 겪겠느냐며 산 것이 죽은 것만 못하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해골의 말을 음미해보면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또한 흙벽 틈으로 달리는 말을 보며 드는 생각일 뿐이니, 어차피 남은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고 보면 모든 것이 그저 부질없기만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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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아연

이대 철학과를 나와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 기자를 지내고, 현재는 자유칼럼그룹과 자생한방병원 등에 기고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소설『강치의 바다』 장편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를 비롯,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마르지 않는 붓(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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