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업체들이 한국에 고마워하는 이유

세계 반도체 업체들이 한국에 고마워하는 이유

문정권, 삼성에 강제로 노우하우 공개요구
경쟁국 중국이 제일 좋아해

삼성이 쓰는 화학물질 공개는 ‘엔지니어링 노하우' 밝히라는 것

반도체협회 “수백조 넘는 기술가치를 정부가 내놓으라는 것"

메모리 굴기 나선 中은 ‘삼성 노하우' 거져 배우는 기회될 수도

  고용노동부가 산업재해 피해 입증을 이유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관련 생산기술 노하우가 담긴 공장 설비 배치도, 장비, 제조에 사용되는 재료 등의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기로 결정하면서 국내외 반도체 업계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산업재해와 관련이 없는 제3자의 요청에도 잇따라 자료 공개를 허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JTBC 등 일부 방송사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에 삼성은 보고서 공개를 막기 위해 국민권익위원회 산하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제기한 상태입니다.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 공장 전경. /삼성전자 제

겉으로 보면 삼성전자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유독 화학물질 공개를 차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삼성전자는 산업재해 당사자가 요청할 경우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실제 반도체 생산의 핵심 정보가 모두 담긴 정보를 이미 정부에 제출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삼성전자(005930)를 비롯해 SK하이닉스(000660)등 국내 반도체 기업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1990년대부터 해마다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으면서 어렵게 축적해온 메모리 반도체 생산 노하우가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언론사, 시민단체 등에 의해 아무런 통제 없이 흩뿌려질 위기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삼성전자는 왜 비밀주의를 고수할 수 밖에 없나
일부 언론사들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우리나라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영업기밀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봐야합니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다른 산업과 달리 하나의 '레시피(recipe)'를 토대로 다수의 공장을 건설해 같은 품목을 반복해서 생산하는 방식입니다. 즉 정형화된 작업에서 얼마나 디테일에 강한 지가 바로 기술력의 격차로 이어집니다. 레시피 하나가 노출되면 생산의 모든 노하우가 드러나는 셈입니다.

반도체 산업은 생산 과정의 핵심 지점이 조금이라도 노출될 경우 다른 부분을 추정할 수 있는 특성도 있습니다. 국내 반도체 장비업계 관계자는 "생산라인을 설립하는 건 사실 반도체 장비만 구매해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엔지니어링 노하우"라며 "삼성 반도체 공장 내 장비들의 위치만 봐도 생산 방식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우리나라 메모리 기업이 다른 기업과의 기술 협력을 극히 꺼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디테일에 의해 좌우되는 반도체 산업은 정보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윤성로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삼성뿐 아니라 인텔의 경우 반도체 팹을 건설할 때 '카피 이그잭트(Copy exact)'라는 원칙을 갖고 있는데, 이는 반도체 생산에 쓰이는 조명, 염료 등 모든 것들을 동일하게 카피하는 전략"이라며 "반도체 생산의 아주 작은 부분에 따라 생산성, 수율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내부 전경. /삼성전자 제공

‘수출 효자’ 한국의 대표 기술자산 막 굴리는 고용노동부
반도체업계, 학계 전문가들은 정부의 반도체 공장 정보공개 방침에 경악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특히 중국이 '반도체 굴기(倔起)'를 선언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 산업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 장악을 꿈꾸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 반도체 정보공개가 파국을 앞당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우선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이같은 정보가 영업기밀이 되는 이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반도체 생산공정에서 사용되는 물질, 브랜드 등만 알면 되는데 그게 얼마나 큰 영업비밀이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브랜드 하나만 공개되도 경쟁 기업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줄 가능성이 높다는 반응입니다.

가령 반도체의 원재료인 웨이퍼 위에 회로 패턴을 그리는 포토 소그래피(photolithography) 공정은 반도체 생산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공정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수율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웨이퍼 위에 어떤 화학 물질을 입히는 가 입니다. 고도의 감광성, 접착성, 내부식성을 요구하는 이 화학물질은 포토레지스트(Photoresist)라고 부르는데, 삼성이나 SK하이닉스 모두 서로 다른 물질을 사용합니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연구소 공동소장은 "특정 반도체 기업가 어떤 브랜드, 어떤 모델의 포토레지스트를 사용하는 지는 반도체 산업에 진입하는 기업들 입장에서 아주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며 "화학회사가 내놓는 포토레지스트가 수백개에 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메모리 산업 진출에 대문 열어주는 격"
이번 정보공개가 중국의 낸드플래시 산업 진출에 교두보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공장에서 어떤 장비, 화학 물질이 쓰는 것 만으로도 중국 반도체 기업이 곧바로 한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주장이 과도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업계에서는 우려할만한 근거가 충분하다는 입장입니다.

특히 중국이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할 것으로 알려진 3D 낸드플래시의 경우 어떤 화학물질을 쓰는 지가 셀(Cell) 적층의 핵심 요소입니다. 3D 낸드의 경우 온갖 종류의 화학약품 처리를 통해 표면장력(surface tension)을 낮추는 것이 적층의 핵심인데, 어떤 장비와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면 중국 기업들에게 낸드플래시 산업 진입의 문을 열어주는 격이 됩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음식 레시피로 비유를 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집 레시피를 정부가 공개해서 새로 차리는 음식점에다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삼성전자 반도체 정보공개가 수백조원의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잠재력을 따지고 보면 아예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수준의 국가적 자산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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