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말살형과 미투 운동 (2018년 3월 27일) [김홍묵]


기록말살형과 미투 운동 (2018년 3월 27일)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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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말살형과 미투 운동 (2018년 3월 27일)

2018.03.27

고대 로마에는 기록말살이라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원로원이 반역자나 국가에 불명예를 끼친 자들에게 내리는 형벌입니다. 폭압 정치를 행한 황제가 대상입니다. 그런 자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심판으로 로마에 남아 있는 모든 역사기록과 작품은 물론 조각상에 새긴 이름까지 지워버렸습니다. 이름조차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못하게 하고, 마치 로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으로 낙인찍었습니다. 그 시절엔 기록물이 흔하지 않아 오늘날보다 기록 삭제가 쉬웠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황제는 네로(재위 AD37~68)와 도미티아누스(재위 AD51~96)입니다. 16세에 황제 자리에 오른 네로는 자신의 스승인 세네카(철학자·정치가)를 원로원 반란의 주범으로 몰아 자결하게 한 뒤부터 성격이 포악해져 끝내는 어머니와 아내까지 죽였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잔인하고 허세 부리기를 일삼았습니다. 84년 사촌형 사비누스를 처형한 뒤 85년 종신 감찰관이 된 그는 원로원 의원들을 반역죄로 고발하고, 장군들을 강력하게 통제해 자신을 ‘주인이자 신’(dominus et deus)으로 부르게 하는 등 공포정치를 자행했습니다.

#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기록말살형
그들도 100% 악행만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네로는 예술에 조예가 깊고 건축에도 상당한 열정을 보였습니다. 도미티아누스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시절 6번의 집정관 경험을 토대로 속주(屬州)를 잘 다스렸으며 공공시설 건설, 사회간접자본 정비 등 업적도 있었습니다.
칼리굴라(재위 AD37~41)나 하드리아누스(재위 AD117~138) 황제처럼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형벌을 면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가들은 당시 기득권 세력인 원로원과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으로 처벌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달 들어 한국은 성폭행 회오리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일과성 폭풍이 아니고 특정 지역이나 직업에 국한되지 않는 강풍입니다. 정계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초긴장 상황이고 국민들은 적어도 세 번은 놀랐습니다. 첫째는 성폭행 가해자의 범위가 너무나 넓어서입니다. 예술인(시인, 연극·영화감독, 만화가, 배우, 가수)을 비롯한 교육자(교수·교직원), 정치인(전·현직 국회의원), 기업가(대기업 임원과 직장 상사), 종교인(신부·목사·변호사), 법조인(판사·검사), 고위 공직자(도지사·도지사 예비 후보), 언론인(종편TV 간부) 등…. 어디 이들뿐이겠습니까.

# 인권·평등·정의 외치던 권력자들의 만행
둘째는 가해자들의 가면을 벗겨 보니 대부분 인권·정의·평등을 부르짖던 원로·중진·권력자들이란 점입니다. 한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감으로 십수 년간 오르내린 고은 시인, 연극계의 대부로 군림해 온 이윤택·오태석 연출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끌며 아프리카 빈민 구호에 나섰던 한만삼 신부, 민주당의 전략통 민병두 국회의원, 특별사면까지 받은 정봉주 서울시장 후보자, 스스로 “나는 폐족(廢族)”이라고 선언했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까지 떠오른 안희정 전 충남지사 등이 대표적 얼굴들입니다. 언론 보도대로라면 모두 인면수심(人面獸心) 면후심흑(面厚心黑)의 장본인들입니다.

셋째는 정치권의 음모론입니다. 지난 7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의 청와대 오찬에 앞서 홍준표 한국당 대표가 먼저 포문을 열었습니다. “안희정 사건 딱 터지니까 밖에서는 임종석 실장이 기획했다고 하더라”며 “미투(#Me Too) 운동에도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임 실장은 “(홍) 대표님이 무사하신데 저도 무사해야죠”라고 응대했습니다. 이를 본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한국 남성들 중 당당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 조배숙 민주평화당 대표는 “지금 발 뻗고 잘 수 있는 이들은 여자들”이라는 말들을 했다고 합니다. 이 나라엔 윤락녀들에게조차 돌을 던질 수 있는 죄 없는 남자는 없어 보입니다.

특히 가해자들 중 진보 쪽 인사들이 많은 것을 두고 색깔론을 대입하는 주장도 많습니다. 진보 진영이나 운동권 집단에서는 ‘동지’를 규합하고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성을 통한 결합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경험칙을 토대로 야합·집단 성폭행을 공공연히 자행해 왔기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지난 5일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행 사실을 고백한 김지은 정무비서의 폭로도 여권 내 권력 암투와 상대 세력을 제거하려는 음모라는 가설이 SNS를 뒤덮고 있습니다. 권력 투쟁에는 이념도 동지도 없는 살벌함만 횡행하는가 봅니다.

# 청소년들의 텅 빈 속은 뭘로 채우나
이런 와중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은 문제 인물들의 흔적 지우기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교육부는 중·고교 교과서에 실린 고은·이윤택·오태석의 작품과 인물 소개 38건을 모두 삭제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고은 이사장을 면직 처리했습니다. 자치단체들 중 서울시는 서울도서관의 고은 작품 전시실 ‘만인의 방’을 없애버렸고, 수원·포항·마산시도 청사나 관내의 고은 시화나 희생자 추모 시비를 철거했습니다. 로마식 기록말살형에는 못 미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치욕이나 나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보다 더한 좌절과 회한에 빠진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그들의 행적을 미화한 교과서를 통해 배운 청소년들입니다. 괴물·노추·위선인 줄 모르고 그들에게 심취했던 청소년들은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아무 효과가 없는 녹말이나 생리식염수 등을 유효성분이 있는 것처럼 위장해 환자에게 투여했을 때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의 피해자들입니다.  뒤늦게 가짜약에 속은 사실을 알고 허전하거나 괘씸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의 텅 빈 속을 치유할 방법이 있을까요. 깡그리 피를 갈아치울 수도 없고, 머릿속을 헹궈낼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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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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