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지킬과 하이드 [정숭호]


내 안의 지킬과 하이드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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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지킬과 하이드

2018.03.26

동네 상가 5층에 있는 목욕탕에서 시원하게 때를 벗긴 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카운터 여사장이 택시회사에 전화를 건다. 경기 남부지역인 우리 동네 택시는 거의가 콜택시다.

“여보세요. 여기 ○○ 사우나인데요, 택시 하나 보내주세요.” 저쪽에서 어디까지 가냐고 물은 듯, “△△ 2차 아파트랍니다. 할머니 한 분이에요”라고 대답한다. 여사장은 잠시 후 전화기를 내려놓더니, “차가 없대요. 거리가 짧아서 그러는 것 같아요. 어떡하지요?”라며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할머니-팔순이 가까워 보이는-를 쳐다본다. 신발을 신고 있던 다른 할머니가 “댁까지 얼마나 나오슈?”라고 묻는다. 택시를 부른 할머니가 “4천 원, 콜비까지 해서”라고 답하곤 “어떡하나, 마냥 기다려야겠네 …”라면서 한숨을 쉰다.

1㎞ 남짓한 거리인데, 보나 마나 다리가 아파 못 걷는 게지, 퇴행성관절염 같은 거. 마을버스를 타려 해도 거의 같은 거리를 걸어야 한다. △△ 2차 아파트는 우리 집 가는 길목이다.
“할머니, 내가 태워 드릴게요. 가는 길에 내려 드릴게요.” “아유, 감사합니다.” 지하 1층 주차장에서 할머니를 태웠는데, 이런, 주차권을 처리 안 했네! 할머니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다시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렀다. 두 대가 다 5층에 걸려있다. 기다리면서 차 있는 곳을 봤더니 주차장이 온통 컴컴하다. ‘노인인데, 무서워하지는 않겠지’ 생각하고 먼저 내려온 엘리베이터를 탔다. 목욕탕 카운터 앞 입력기에 차 번호를 누르고 엔터를 친 후 엘리베이터를 봤더니 한 대는 1층에서, 한 대는 지하 2층에서 느릿느릿 올라온다.

먼저 올라온 놈에 올라타고, 문이 닫히려는데, 아줌마보다는 나이가 많고, 할머니보다는 젊은, 좌우당간, 나보다는 어려 보이는 여자 6~7명이 익어서 빨간 ‘쌩얼’로 우르르 나타나더니 그중 한 명이 잽싸게 뛰어와서는 열림 버튼을 누르고는 “빨리 와, 빨리!” 소리친다. 다 탔나 했더니 아직 한 명이 남아있다. 주차 입력기에 번호를 누르고 있다. 서둘러서 그러는지, 서툴러서 그러는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우물쭈물하는 게 보인다. 아직까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던 여자가 이제는 “천천히 해, 천천히!”라고 소리친다.

마침내 문이 닫힌다. 천천히. 열림 버튼에서 손을 떼고 지하 2층 버튼을 누른 여자가 그제야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큰 목소리로 “미안합니다. 아자씨” 그런다. 가만있거나, “괜찮습니다”고 하거나, 둘 중 하나가 평소의 내 반응일 터인데, 속에서 뭐가 꼬였다. “그러면 안 되지요. 사람이 밑에서 기다리는데…”라고 그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할 이유를 들어 그 여자를 준엄히 꾸짖었다.

여자가 동료들을 돌아보더니, 자신감이 생겼는지, “아이, 1분이 걸렸어요? 2분이 걸렸어요? 서로 배려하고 살면 좋잖아요. 요즘 다들 배려하라고 그러던데. 그거 잠깐 기다렸다고 너무하시네?”라고 턱하니 내 말에 시비를 걸친다. ‘응? 배려하라고? 배려는 내 전공인데? 어제도 배려, 감사, 미안함 같은 걸로 글 한 편 썼는데, 내 앞에서 배려를 운운하네? 친구들 앞에서 훈계 듣기 싫다 이거지? 나도 늙었다고, 여성호르몬이 더 많아진 잔소리꾼 심술 할배라고 ….’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한마디로 압축돼 내 입에서 나왔다. “그럼요, 배려해야지요. 남을 무조건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요.”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영감탱이가 겁도 안 먹고 친구 말에 대꾸하는 게 재미있다는 듯 다른 여자들은 전부 킥킥댄다.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도 보였다. 이 여자, 친구들 앞에서 지기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재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여고 시절 친구들과 ‘얼빵한’ 남학생 하나 놀려먹었던 게 생각났는지, 나를 아래위로 훑더니, “아이고 이 아자씨, 젊고 예쁜 여자가 탔으면 이러지 않을 텐데, 우리처럼 늙고 못난 게 기다리게 해서 심술이 났나 보네!”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먼저 웃는다. 친구들도 웃는다. 나도 웃는다. 그러고는 그 여자에게 “맞아요. 잘 아시네”라고 일격을 날렸다. 말이 잘 되는 날이었다. 반응이 늦어 형광등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온 내 입에서 이날은 말대꾸가 백열등처럼 순간순간 튀어나왔다.

내 말에 친구들 웃음이 더 커졌다. 여자의 얼굴이 더 빨개지면서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심하게 일그러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 등 뒤에서 그 여자가 카운터를 날린다. “누군지 몰라도 그 집 마누라 속 많이 썩겠다!” 친구들이 모두 크게 웃는다.

할머니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시동을 걸어 바깥으로 나왔다. △△ 2차까지 가는 짧은 시간에 할머니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다. 보통 때는 동네 젊은 엄마 하나가 목욕탕에 왔다가 함께 돌아갔는데, 오늘은 일이 있다고 데려다만 주고 갔다고 한다.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며칠 전까지 병원에 있었다고도 했다. 기다리다가 택시를 다시 불러도 되는데, 너무 늦으면 혼자 있는 ‘할아버지’가 점심 굶는 게 걱정이 됐다고도 했다.

△△ 2차 아파트 입구에서 한 발씩 천천히 내리던 할머니가 다 내려서는 문도 안 닫고 허리를 구부려 길바닥에서 뭔가를 줍는다. 길이 3㎝쯤 되는 끝이 뾰족한 나사못이다. 그걸 나에게 보여주면서 “아이, 이런 걸 왜 흘리고들 다닐까, 이게 바퀴에 박히면 빵구가 나지요? 큰일 날 뻔했네”라고 했다. “고맙습니다”고 했더니 “네 조심히 가세요. 복 받으세요”라고 말하고는 걸어갔다.

집으로 가다가 신호를 기다리는데, 깊이 들어간 줄 알았던 하이드 씨가 또 나타났다. 그리고는 "왜 엘리베이터 문 닫힐 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집 영감도 마찬가지일 것 같소'라고 안 했냐?”고 나에게 화를 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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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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