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단말머리 중학생의 이야기 [한만수]


어느 단말머리 중학생의 이야기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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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단말머리 중학생의 이야기

2018.03.09

머리카락은 사람의 두피에서 자라는 털의 한 종류입니다. 머리카락은 인간이 진화하면서 규모가 많이 축소된 다른 털들과는 달리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풍성하고 긴 털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평균적으로 9만~12만 올 정도의 머리카락이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 머리카락이 중요한 이유는 보온효과입니다. 열은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없으면 체온이 머리 부분에서 상당히 많이 손실되기 때문에 다른 털은 다 퇴화해도 머리카락은 여전히 붙어있는 이유입니다. 땀이 얼굴이나 눈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시야가 중요한 테니스나 축구 선수들 중에는 일부러 머리를 일정 길이 이상 기르고 머리띠나 핀으로 정리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머리카락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차이점으로 중요한 작용을 했습니다. 남자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여자는 길게 기르고 있어서 멀리서도 금방 남자와 여자를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남학생은 머리카락부터 짧게 잘랐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 아이들은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몽실하게 남겨둔 상고머리를 했습니다. 한 반 중에 상고머리를 한 남학생은 다섯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고, 나머지 학생은 머리 깎는 비용을 아끼려고 짧게 자르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겨울이면 남학생들은 모자를 쓰고 다녀서 추위를 덜 탑니다. 단발머리의 여학생들은 토끼털로 만든 귀마개를 하거나 털실로 짠 목도리를 하고 다녔습니다. 짓궂은 남학생들은 머리카락이 긴 여학생 뒤에 몰래 다가가서 긴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놓고 깔깔 웃으며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머리카락이 긴 여학생들은 옷도 잘 입고 얼굴도 예쁘게 보이는 데서 비롯되는 부러움 섞인 시샘 때문이었을 겁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계속 머리를 짧게 깎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여학생들도 단발머리를 유지하느냐, 머리를 기르느냐는 중요합니다. 머리카락을 기른다는 것은  집에서 농사일을 돕거나 대처에 취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우연한 기회로 천호동에 있는 직물공장 구경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직기(織機)로 광목을 짜는 공장이었습니다. 공장 마당을 들어서자 직기로 광목을 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50여 대의 직기 앞에는 적게는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녀로 보이는 여자들이, 많게는 20대로 보이는 여자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손바닥 크기의 쪽가위로, 광목천 위에 돌출된 실을 끊어 내거나, 북실이 끊어지면 빠르게 이어주며 직기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들 중에 몇몇 소녀들이 중학생 교복에 모자를 쓴 저를 바라보고 이내 황망하게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합니다. 10대 또래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될  그 무엇을 들켰다는 부끄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녀들이 왜 부끄러워하는지 이유를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니 그녀들의 얼굴에 묻어 있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동경의 대상에 대한 설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앞집과 뒷집의 울타리가 낮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살던 집도 뒷집과 사이에 있는 담이 낮았습니다. 담 너머로 음식을 주고받거나, 동네에 무슨 소문이 돌면 어머니들이 담을 사이에 두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방 뒷문을 열면 뒷집의 마당이 보이고, 정지문을 열어 놓았을 때는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는 뒷집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느 해 초가을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젖빛 안개가 끼어 있는 뒷집 마당으로 책가방이 내던져졌습니다. 이어 뒷집 아저씨가 거칠게 밖으로 뛰어나오시더니 마당에 널려 있는 중학생 책을 대충 쓸어 담아 정지로 들어가셨습니다. 아침밥을 짓는 아궁이에는 불이 지펴져 있었습니다. 그 안으로 책을 집어넣으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어서 중학생인 제 여동생과 같은 반인 뒷집 정순이가 마당에서 팔짝팔짝 뛰며 우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살짝 열고 보니까 자기 책을 아궁이에 태우는 광경에 놀라 울고 있었습니다. 저하고 같은 반인 친구는 여동생 옆에 서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게 보였습니다.

그해 추석 전날이었습니다. 서울의 무슨 봉제 공장에 다닌다는 정순이가 내려왔습니다. 정갈하게 깎은 단발머리 대신 어깨를 덮은 긴 머리카락을 한 모습이 잠깐은 성숙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정순이의 모습에서 천호동 직물공장에서 본 어린 여공의 모습이 중첩되는 것을 느끼며 슬픔이 가슴을 채웠습니다.

그날 밤 제 여동생한테 놀러 온 정순이는 늦도록 봉제공장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서울이라는 데는 어떤 곳인지, 월급을 타서 모두 집에 보내느라 화장품을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산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장딴지를 주무르고 있는 정순이의 손가락 마디가 유난히 단단해 보였습니다.

정순이가 매달 보내는 돈으로 제 친구와 그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오빠와 남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무직에 취직을 해서 사회인으로 살아갈 때도 정순이는 공장을 다녔습니다.

지방에는 해마다 동문체육대회라는 것이 열립니다. 어느 해인가 동문체육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정순이를 만났습니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체육대회 가는 길이냐고 물었습니다. 정순이는 부끄럽게 웃으며 “오빠, 나 중학교 이 학년 다니다 그만뒀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정순의 얼굴은 나이가 들어서 단발머리 앳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지만 부끄러움이 묻어 있는 목소리에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맥없이 웃어 버렸습니다.

요즈음 미성년자에게 돈을 주고 성을 사는 못된 어른들의 기사가 가끔 인터넷을 장식합니다. 그런 기사를 볼 때 지금도 학생들이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면 최소한 모텔 출입은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지하철역 안에 있는 물품보관소 앞에서 갈아입은 옷을 보관하는 여학생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청순해 보이는 얼굴은 화장으로 감추고, 짙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에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은 모습이 언뜻 20대처럼 보이지만 그녀들의 정신연령은 10대 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얼굴에서 직기 앞에 서서 쪽가위로 실을 끊는 여공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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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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