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가 무서워야 좋은 뉴스가 만들어집니다. [박상도]

소비자가 무서워야 좋은 뉴스가 만들어집니다.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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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가 무서워야 좋은 뉴스가 만들어집니다.

2018.02.13

필자는 필자가 진행하는 뉴스뿐만 아니라 매일 발행되는 신문과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를 검색하는 것이 하루 일과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종이 신문보다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해서 보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기사로 뉴스를 볼 경우엔 꼭 뉴스 하단의 언론사 이름을 확인합니다. 왜냐하면 뉴스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수의 인터넷 매체들은 정확한 취재 없이 타 매체의 뉴스를 받아서 제목만 바꾸거나 기사에 살을 붙여서 재탕, 삼탕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메이저 신문사의 경우도 매체마다 극한 보수, 중도 보수, 진보로 나뉘어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어서, 사안에 따라 행간을 잘 읽어야 진실이 보입니다.

필자의 경우는 직업적으로 이 일을 하는 경우이고, 수십 년 동안 이 일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필터링을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일이 힘이 듭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기사의 양이 너무 많은 것이고 또 하나는 기사의 질이 너무 낮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여기에 하나가 더해졌는데, 바로 정치적 대립이 극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립의 끝판왕 격인 이슈가 있었는데 바로 ‘평화올림픽 vs 평양올림픽’이 그것입니다.

‘평양올림픽’이란 말은 ‘좌파’라는 단어와 더불어 현정권을 특정 짓는 프레임 역할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올가미를 씌워서 얻는 이익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우리나라가 처한 현 상황이 매우 곤궁하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질 판인데 고래들이 싸우지 않게 잘 달래면서 이 위기를 타개해 나가도 모자랄 판에 새우끼리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입니다.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한 것은 이번 정부의 실책입니다. 북한에 저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비치는 모습 또한,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평양올림픽이라는 단어는 만들어지면 안 되는 단어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아무런 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 수년간 공을 들여 유치한 평창올림픽을 우리 스스로 평양올림픽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의 긍지를 깎아 내리는 행위이고, 국론의 분열을 보여줌으로써 일본 같은 이웃국가들이 우리를 더욱 가볍게 여기는 빌미를 주었으며, 그 결과 펜스 부통령과 아베 총리가 남의 잔치에 와서 결례를 범하는 빈틈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정부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른 나라에 우습게 보이지 않게 체면을 지켜줘야 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투표로 힘을 실어 줬으면,반대표를 던졌던 사람이라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정당성을 인정해 줘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입니다. 

잘되는 집안을 보면 형제끼리 우애가 매우 돈독합니다. 그럭저럭 유지가 되는 집안을 보면 형제끼리 아옹다옹하다가도 옆 집에서 시비를 걸면 똘똘 뭉쳐서 대응을 합니다. 망하는 집안은 형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웃집 친구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사드배치,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 평창 올림픽 북한 참가 등등, 사안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한마음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싸우더라도 이 싸우는 소리가 집 담장을 넘어가면 안 되는데 수시로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필자는 분란을 확대한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뉴스 공급자는 대결 구도를 만들어야 스토리가 매력적으로 변하고 싸움을 진행시켜야 뉴스가 확대 재생산되어 이슈를 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들은 뉴스란 자신들이 생산해서 파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간혹 모호한 대결구도일 경우, 과감하게 이름을 붙여 교통정리를 해주기까지 하는데, 이는 뉴스 소비자에게 복잡한 뉴스를 단순화시켜서 쉽게 읽히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어찌보면 친절한 행위 같지만, 이 역시 실제보다 갈등의 양상을 단순화시켜 더 크게 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심지어 극소수의 주장조차도 굳이 뉴스로 만들어 갈등이 있는 것처럼 비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5년 동안 래리킹 라이브를 진행한 관록의 언론인 래리 킹이 선호하는 출연자의 유형 중에 ‘무언가에 굉장히 화가 많이 난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즉, 뉴스 장사를 하는데 싸움만큼 흥행이 되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굳이 싸울 일도 아닌데 국회의원이 여야로 나뉘어서 초등학생들처럼 싸우는 이유는, 그래야 기사가 생산되고 뉴스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그런 모습을 통해서 존재감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책동이 반복되는 이유는 국민이 우습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포털에서 ‘평양올림픽’과 ‘평화올림픽’의 조회수를 가지고 유치한 대립을 하는 국민에게 품격 있는 뉴스, 품위 있는 정치인은 선택 받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주장이 다를 경우 언론의 역할은 각각의 주장을 수렴하여 통합의 길을 만들어주는 것인데, 싸움만 붙이고 나 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으로 인해 결과가 생기고 그 결과는 특정한 영향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최근의 기사들은 결과만 얘기하고 맙니다.평양올림픽이라는 말만 기사화할 뿐, 평창올림픽 이후, 북핵으로 인해 불거진 불안한 국제정세에 대한 질문은 외면합니다. 그리고 보다 근원적인 질문인 ‘통일’에 대한 질문은 던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고 눈에 보이는 쉬운 현상만 쫓고 있습니다.

정치도 언론도 바뀌기가 어려울 것같이 생각되면, 시민의 힘으로 변화를 이뤄내야 합니다. 우선 미디어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사이공식 처형’이라는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필자도 학창 시절에 이 사진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워낙 강렬한 장면이라, 의심의 여지 없이 권총을 든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인식을 하였고 총알이 관통하는 고통 속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바짝 마른 사람은 선량한 시민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방아쇠를 잡아 당겨 즉결 처형을 하는 사람은 공산당 간부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애디 애덤스(1933~2004)는 1969년에 퓰리처 상을 받았고, 이 사진은 미국 내에서 반전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팩트는 전혀 달랐습니다. 즉결 처형을 당하는 사람은 악명 높은 베트콩 간부로 무고한 시민을 강간하고 살해한 장본인이었고, 이 사람을 즉결 처형한 사람은 신망이 두텁던 구엔 곡 로안 장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한 장의 사진으로 그는 살인자의 낙인이 찍혔고 베트남의 패망 후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평생을 손가락질을 받으며 불우하게 살다가 1998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사진을 배포한 AP통신은 이 사실을 알고도 바로잡지 않았고, 사진을 찍은 애디 애덤스 역시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서야 진실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는 "장군은 총으로 베트콩을 죽였지만, 나는 카메라로 장군을 죽였다."고 말하면서, 사진은 진실의 단편만을 이야기할 뿐이라고 얘기 했습니다.

인터넷 기사를 보면 수많은 단편적 진실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어떤 것은 90%가 진실인 것도 있고 어떤 것은 1%의 팩트에 99%의 소설을 붙인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의도를 가지고 팩트를 와전시켜 해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뉴스를 전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 매우 가슴 아픈 일이지만, 뉴스의 소비자가 현명해져야, 정치도 언론도 정신을 차립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12뉴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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