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9년 [정달호]


제주살이 9년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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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9년

2018.02.06

몰려오던 중국 관광객이 대폭 줄었는데도 여전히 제주에는 사람이 많이 온다. 김포-제주 간이 세계에서 가장 빈번한 항공 루트라는 것만 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주를 찾는지 알 수 있다. 제주 공항에서 창밖으로 활주로를 내다보면 비행기가 간단없이 뜨고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시로 오는 관광객도 있지만 아예 제주에 살러 오는 사람도 많다. 한 해에 1만 5천명쯤이 제주에 이주해온다니 대단한 인구 유입이다. 그중 30대 전후의 젊은 층도 많다고 하는데 그냥 은퇴 후의 삶을 살러 오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삶의 질을 찾아서 오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다. 

물론 왔다가 잘 정착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3년을 버티면 아주 정착할 가능성이 높으며 돌아가는 이는 대개 3년이 고비라 한다. 특히 단독집을 마련하여 사는 사람들 중에는 잡초라는 복병을 이기지 못해 돌아가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제주에 내려와 산 지 9년째에 접어든 나는 제주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부러움을 산다. 제주살이를 로망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효리네 민박'처럼 티브이에서도 제주살이에 관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사실 나는 제주에 살기 위한 결심을 진작부터 하고 내려온 것은 아니다. 평생 다니던 직장을 은퇴하고 뭔가 할 일을 찾던 중 제주에 일자리가 생겨서 내려왔다. 서귀포에 터를 잡고 두어 해 지난 후 제주가 좋아서 그대로 눌러앉기로 한 것이니 그저 운이 좋아서 순탄하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잡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단독집에 사는 우리도 잡초에 시달려 제법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잔디밭을 깔끔하게 유지하고 싶은데 어디서 오는지 잡초는 끊임없이 솟아난다. 뽑고 나서 뒤돌아보면 그 사이에 잡초가 또 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름이 없을 뿐 나도 풀꽃인데 왜 이리 박대를 하나 하는 잡초의 볼멘소리가 들리지만 일단 잡초를 뽑아 없애야 정원이 제 모양을 갖춘다는 생각으로 지내온 것이다.

한라산 언저리에서 아홉 번째 사계를 맞으며 잡초에 대해 점차 대범해짐을 느낀다. 요즘은 잡초를 보아도 그렇게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읊은 나태주 시인처럼 잡초가 딱히 예쁘거나 사랑스럽지는 않아도 잡초를 보면 무심하거나 관대해진 편이다. 

잡초를 대하는 마음이 바뀐 데에는 한 가지 지혜가 작용한 면도 있을 듯싶다. 잡초가 날 자리에 미리 다른 꽃을 심는 것이다. 여기에 딱 맞는 꽃들이 있는데 세이지류, 라벤다, 로즈마리가 그렇다. 이들은 빨리 자라서 땅을 그늘지게 함으로써 잡초가 번성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이런 역할까지 해주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허브로 불리는 이런 식물은 향내가 좋아서 부엌 요리에도 귀하게 쓰이니 말이다. 

올해는 키가 큰 블루세이지라는 허브과(科) 식물을 구해서 곳곳에 심을 계획이라 미리부터 즐겁다. 이런 허브들은 차로 끓여서 마실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주로 커피나 녹차 또는 메밀차 정도가 고작인 차탁(茶卓)에 다양한 허브차와 갖가지 꽃차를 더한다면 삶이 더욱 향기로워질 것이 아닌가.

최근에 만난 어떤 분은 10여 년 꽃차를 연구하다가 제주로 내려왔는데 이분 덕에 우리는 요즘 꽃차의 매력에 반해 있다. 이분은 우리 마당에 핀 금목서들을 보고 자기 가게에서 내는 꽃차에 금빛의, 좁쌀만 한 그 꽃 한두 개를 떨구어 놓으면 차가 더욱 빛이 날 것이라 하면서 그렇게 반겼다. 우리는 금목서 꽃을 따 가게 하고 그 대신에 얻어 온 다양한 꽃차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바깥에는 매화에 벌써 움이 돋아 있는데 얼마 안 있어 홍매화, 청매화 꽃으로 은은한 향의 매화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매화는 십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그 향이 멀리 퍼져 나간다고 한다. 추운 겨울날 눈발 속에서도 곱게 피어나며 추울수록 향이 강하다니 가상할 뿐이다. 

겨울 꽃이라면 또한 수선화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연전에 누런 겨울 마당에 유난히 푸르게 돋은 잡초 보기가 싫어서 생각한 방안 중 하나가 수선화를 많이 심는 것이었다. 수선화는 보기에는 청초하고 가녀린 것 같지만 뿌리가 구근이라서 생명이 여간 튼튼한 게 아니다. 봄에 마늘 같은 모양의 둥근 뿌리를 한두 개씩 갈라 마당 곳곳에 심어놓은 수선화가 여름, 가을 지나 겨울 서리를 이기고 온 데 피어 있어 좋다. 

제주 대정(모슬포)에서 오랜 유배 생활을 보낸 추사(秋史)는 제주 사람들이 수선화를 잡초 대하듯 한다고 은근히 나무라면서 수선화를 아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른 봄 동백이나 가을철 억새 못지않게 제주 어디를 가나 수선화를 볼 수 있다. 고교 때 국어책에 나온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수선화란 시가 준 깊은 인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수선화를 더 예쁘게 봐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제주에 사람이 많이 온다는 얘기를 하다가 제주살이의 자랑만 늘어놓은 것 같다. 그렇다. 며칠 지내러 오는 관광객의 눈에는 폭포나 절벽, 곶자왈 숲과 지질동굴 같은 자연의 볼거리가 다일지 모르나 오래 사는 사람으로서는 사계절 변하는 한라산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 자체가 큰 매력이다. 시시각각 모양이 변하는 구름은 하늘에 펼쳐진 광대무변의 예술이다. 밤하늘에 총총한 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청청 제주의 매력이다. 어딜 가나 시야를 사로잡는 바다 . . . 도시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것들이다. 

제주에 살러 오는 이주민이 늘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디든 살기 좋은 데는 사람이 모이게 마련이다. 하긴 지금 살고 있는 사람 수만으로도 제주의 생태는 몸살을 앓고 있으니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제주가 자랑하는 천혜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많고 적음보다도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자연을 보전하는 좋은 정책일 터이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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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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